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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말씀2011.03.22 (화)

계시말씀

선포일
2011.03.22 (화)
성경 본문
새벽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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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부활의 길. 주님이 원하시는 이 시대의 차원 높은 순종의 사랑 작성일 : 2010. 9. 13 (월) 새벽 2:50 작성자 : 성지연 (서울 충성교회 캠퍼스) [ 주님 앞에 더욱 온전한 사랑으로 행치 못한 것을 회개하며 더 잘하겠다고 기도드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 니다. “내 사랑아, 평안하느냐? 네 신랑 주 예수 그리스도니라. 어제도 오늘도 오직 실천자만이 업적을 남기고 발자취를 남기는구 나. 섭리의 길이 얼마나 닦였는지 보고 싶으냐?” “주님의 뜻이라면 보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 간 이상이 보였습니다. 공중에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들이 굽이굽이 여러 갈래로 위를 향해 뻗어있었습니다. 먼저 보인 장면은 여러 갈래인 계단 사이를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또 계단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 계단 사이로 날아다니는 사람들, 옆에 마련되어 있는 한 장소에서 편히 쉬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끝없는 이어진 계단의 위쪽에 있는 한 사람은 ‘위대한 힘. 기도’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습니다. ] * 예수님 말씀 * 네 선생의 길은 이미 내게로 가까이 와 너희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을 게다. 내가 보여준 것을 잘 표현하여라. 내가 섭리의 현재 재림의 때에 이루어지는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었노라. 구불구불한 끝없는 계단을 걸어 오르는 사람은 조금씩, 조금씩만 변화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변화가 더딘 자들이다. 갈 길이 멀건만, 땀 흘리며 한 계단씩 걸어가고 있 구나. 이쪽 계단에서 저쪽 계단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은 오락가락, 부활의 삶에서 제자리로, 혹은 타락하였다가 또 부활, 또 타락을 반복하는 자 들이다. 부활을 이루는 과정에서 마음의 타락을 하는 즉시 지금껏 걸어온 계단을 기본 1000단계 내려온다 생각하면 된다. (“이상을 보여주셨을 때 이 장면이 제일 먼저 보였 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나요?”) 섭리사에 이런 자들이 아직 너무나 많다. 이리저리 계단을 올랐다 내려갔다, 영이 무척 지쳐 있는 자들. 하루는 부활했다가 다음 날은 마음의 타락의 죄로 천 계단, 만 계단씩 퇴보하는 자들. 이런 자들의 수를 세어보니 너무나 많구나. 이 급절한 때에 내가 진정 속이 탄다. (“예수님, 선생님이 가신 길은 어디에 있나요?”) 날아다니는 자들 보았지? 육신의 세계에는 자동차들 지나다니는 차도도 있고, 비행기가 다니는 하늘의 길도 있고, 바다 속의 뱃길이 있듯이 부활 과정의 영계의 길도 마찬가지니라. 네 선생은 이미 가장 높은 차원의 길로 내게 와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노라. 내 말을 믿고, 네 선생 통해 전하는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을진저, 그 또한 선생의 뒤를 따라 첨단의 부활 길로 내게 날아올 것이다. 가장 차원 높은 단계의 부활의 진리와 사랑이 하나 되어 폭발할 때, 그것이 연료가 되어 내게로 날아오를 수 있다. 말씀이 가장 차원 높은 단계의 부활을 가르쳐주는 이정표이니, 말씀에 집중하여 행할 때이다. 참으로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길이다. 순종하는 자는 사랑과 진리의 날개 달고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고, 불만불평, 자기 생각에 차있는 자는 날아오르다 쉬고, 먹고, 마시고, 잠들었다가 떨어진 자신의 연료통에 진리와 사랑을 다시 채우 느라 시간 낭비하고 있구나. 지금 이때 부어주는 진리의 말씀과 사랑의 성령을 떨어뜨리지 않고 내게 꼬박 날아와야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정녕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걸어오는 자는 제 시간에 내게 도착할 수 없다. 올라왔다 내려갔다 반복하는 자는 더 뒤쳐질 뿐이 다. 네 선생이 뚫은 첨단의 길을 하나하나 세밀히도 가르쳐주고 있는데, 왜 보고도 모르고, 듣고도 모르느냐? 보고도 못 보고, 들어도 못 듣는 자는 신약시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들이다. 나는 내 말씀에 순종하는 신부를 찾고 데리러 온다. 네 선생을 보아라. 돌아가는 길을 갈지라도 한마디 불만, 불평 않고 순 종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 마음에 내 마음과 사랑을 가득 채운 까닭이라. 순종자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 이미 일체되어, 말하지 않아도 깨달아 순종하는 것 이다. 지금 이때 내 말씀에 순종하여 어린아이 같이 나를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여호와 이레, 내 아버지가 준비하신 땅에 들어올 수 있다. 이삭이 이것저것 계산하고 아브라함 말에 순종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고 평소 같이 믿고 모시고 섬겼으니, 그 아버지의 길이 늘 올곧았음이니라.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믿음을 지켰고, 이삭 역시, 아브라함에게 순종함이 아니라 내 아버지 여호와께 순종함이었노라. 그러므로 모든 축복을 받아,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내 아버지의 말씀이 임할 때에 늘 아브라함과 이삭, 그들의 하나님임을 말씀하지 않았느냐. 내 아버지는 그 무엇보다 순종의 사랑을 원하신다. 이 시대 순종의 그 차원 또한 높아졌음을 깨달아라. (순종의 차원이 높아졌다고 하신 말씀이 와 닿지 않아서 ‘순종에도 차원이 있나?’ 생각하였습니다. 순간 감동으로 ‘말하기 전에 하는 순종’이 떠올랐습 니다. 그때 기다리셨다는 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 다.) 맞다. 바로 그것이다. 이 시대 성약역사의 ‘순종’의 차원은 바로 내 아버지와 내가 말하기 전에 순종하는 사랑이다. 짝사랑의 한을 푸는 역사이므로 시키는 것에 순종하는 것은 성약 주관권 하늘나라에 의가 되지 못한다. 먼저 주는 사랑, 먼저 주는 믿음, 내 아버지 마음과 내 마음과 일체되어 먼저 하는 순종이다. (“예수님, 선생님은 이미 그 기준을 세우셨지요?”) 그러하다. 신약시대 나의 제자들을 보아라. 베드로가 나를 세 번 부인함은 내가 세 번 사랑을 확인함으로 회복하였다. 그 후 내 양떼를 먹이라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순종하였다. 사도 바울은 내 살아생전에 나를 핍박하였으나 내가 부활한 후에 깨닫고 내 말씀에 순종하였다. 내가 제자들에게 바라는 차원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이 시대 마지막 성약역사만큼은 가장 높은 차원의 순종의 사랑을 원하였다. 기억하느냐? 네 선생과 나의 횟골의 사연을 말이다. 내가 네 선생의 가슴 찡하게 깨닫도록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하느냐~”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나를 만난 지난 세월 늘 먼저 해드리겠다고 다가온 선생이기에 순종의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내 심정이었다. 그 순종의 사랑의 차원이 깨지면 끝이었노라. 그러나 네 선생은 그 사랑 지켜, 지금껏 늘 먼저 절대 믿음과 절대 사랑으로 내게 나아왔노라. 내 신부의 기준이다. 내 말은 참이니 귀 있는 자들은 깨달을지어다. 내 아버지가 계획해놓은 마지막 재림의 역사는 온 전하다. 그 영광에 참여하는 자들 또한 온전한 자들만 함께할 수 있다. 네 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말고 부디 첨단의 부활의 그 길을 통해 날아보아라. 내가 늘 함께한다. 비바람도 내 사랑으로 막아주니 오직 기쁨이다. 사랑한다. 네 신랑 주 예수의 말이니라. (“예수님,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목숨도 바치며 순종하였는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종의 역사는 내 아버지의 말씀이 임한 후 그 뜻에 따라 움직였다. 그야말로 주종 관계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순종은 사랑을 의미한다. 내 아버지와 나의 말이 임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 성삼위의 마음을 움직이고 내 아버지와 내가 말씀하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사 랑이다. 이해가 되느냐? 차원이 하늘과 땅인 것이다. 종이 다가올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지만 신부에게는 허락하듯, 마찬가지이다. 깨달았느냐. 신약역사와도 그 차원이 다르니 너희가 더욱 간구하고 내 사랑을 행하여라.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나, 일어나지 않나 보아라. 내 신부들아. 신랑 말 믿지? 굳건히 믿어라. 사랑하니 말하노라. 내 신부들에게 평강을 빈다. 바쁜 시간 지나가니 모두 시간 뺏기지 말고 나를 찾으라. 바쁘더라도 너희 마음은 돌아본다. 사랑하고 사랑한다. 내 금지옥엽 신부들. 네 신랑 주 예수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