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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말씀2011.03.23 (수)

계시말씀 5791a9ed

선포일
2011.03.2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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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중심과 절대적 중심. 작성일: 2010. 11. 11. (목) 작성자: 장현순 (월명동 형상도예) [“예수님!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선생님을 예수님 의 육신으로, 표상자로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 생님이 늘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살아계심이 감사합니다. 살아계시니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늘 살아갑니다.” 예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육신의 자유를 빼앗은 저와 섭리 와 민족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단상 말씀 중,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해 차원을 높이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다른 말씀이 아니라 또 이 말씀을 전해야 하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차원을 높이 지 못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예수님께 선생님에 관 해 배워 확실하게 속 시원히 증거하고 싶다고 고백 했습니다. ] * 예수님 말씀 *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네 선생을 뽑은 것은 중심을 보고 뽑았기 때문이다. 각 시대는 시대마다 중심인물을 세워 그 시대에 영으로 계신 하나님과 나를 대변해 하늘의 뜻을 꼭 땅에 전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고 땅에 전하는 중보자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몸의 중심 되는 장기 심장을 통해 몸에 피가 공급 되어지는 것처럼 피와 같은 말씀을 심장과 같은 중심자를 통해 전해왔다. 중심인물은 하나님께는 온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인류에게는 하나님과 나를 대신해 사명을 하는 인 물이다. 중심축 역할이다. 중심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라. 중심은 기준으로 중앙이고 푯대이다. 나의 중심이 곧 너희 선생이고 너희 선생의 중심이 나이기에 너희 중심이 너희 선생이다. 중심은 균형을 의미한다. 조화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의 기준점이다. 절대적인 뜻을 나타낸다. 땅에서 섭리가 커지고 발전하면 천상천국도 커지고 발전됨을 찾았느냐? 계시록도 자세히 보아라. 나 네게 말해줄 것이 있으니 깊이 기도하여라. 기도의 기본은 너희 선생을 위해서이다. 내가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 조바심 내 지 말고 함께해보자. 이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고, 이 지구의 중심은 한국이다. 이 한국의 중심은 월명동이고, 이 월명동의 중심은 너희 선생이다. 곧 너희 선생이 있는 곳이 천상천하가 집중하는 중심이다. 그래서 상대적 중심이 있고 절대적 중심이 있는 것이다. 절대적 중심은 바로 너희 선생. 너희 선생이 중심인 것은 절대 변함없는 진리처럼 완전한 진리다. 그리고 상대적 중심은 너희 선생이 거하는 곳, 너희 선생이 관심 갖는 것, 너희 선생의 깨달음, 너희 선생의 기도 등 너희 선생으로부터 일어나는 파장의 모든 것과 너희 선생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상황과 환경 등 너희 선생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니라. 그러니 절대적 중심인 너희 선생은 영원히 변함없 고 상대적 중심은 변화한다. 섭리가 변화하는 것처럼 변화한다. 쉽게 말해주겠노라. 80년 삼선교 때는 그 시절 그 때 중심이 삼선교 교회였으며 90년대부터 월명동을 개발할 때는 월명동 개발이 중심이었다. 그것은 단연 섭리에만 해당되는 역사가 아니라 시대에도 해당되고 너희들에게도 해당되고 저 영계에도 해당되는 중심역사인 것이다. 보아라. 나의 월명동을 개발하였을 당시의 너희 나라와 세계 경제를 한번 찾아보아라. 발전하고 변화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섭리가 발전함같이 나라가 발전한다. 세계가 발전한다. 너희 선생을 핍박하고 억누르고 하면서부터 섭리가 어떠하며 너희 나라가 어떠하며 시대가 어떠함을 보아라. 잘되고 형통하였느냐? 기쁨이 차고 넘쳤느냐? 전쟁의 위험과 전쟁과 싸움과 기근과 각종 재난, 어 려움, 경제의 환란....... 소위 말해 심판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것이다. 왜 심판하는지 왜 심판을 받았어야만 했는지 왜 심판을 받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역사는 사람들이 뜻하던 뜻하지 않던 중심인물로 결정돼 이뤄가는 노정이다. 중심인물을 나의 표상으로 세웠으니 중심인물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이다.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는 하나의 돌고 도는 시간으로 이뤄져 왔다. 크게는 구약 신약으로, 또 지금의 성약으로. 하나님의 법칙 세계를 알아야 하나님을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오묘한 세계를 알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해 내가 늘 너희 선생 통해 말해오지 않았느냐. 모르니 죄를 낳고 모르니 실수하고 모르니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몰라서 세운 자를 막고 몰라서 반대한다. 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온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몰라서 구원세계 이상세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나를 무지로 죽인 대가를 그들은 대를 거듭해 받지 않았느냐. 메시아를 죽인 고통을 그 시대 사람들이 받고 끝난 것이 아니라 후대 자손들까지 지금도 받고 있노라. 그러니 눈을 떠야 한다. 사랑아 하나님은 정녕코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심판의 칼을 들어서라도 너희들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방법을 알아야만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며 알 수 있노라. 그것이 너희를 만든 근본자의 마음이니라. (“예수님! 이제는 다른 차원으로 선생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신 되 신 선생님을 잘 몰라 악평에 흔들리고 힘들어하고 역사가 아니라고 부인도 합니다. 예전과 지금의 말 씀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어휘는 조금 다르게 표현했으나 속뜻도 심정도 변함없는 동일한 말씀이다. 내가 너희 선생을 육신 삼아 이 성약역사를 가고 있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며 네 선생이 천국 역사의 문인 것도 사랑으로 이 역사의 주인 된 것도 다 동일하다. 나는 변함없이 말했고 외쳤고 알렸다. 하지만 듣는 너희들이 너희 주관과 생각으로 색안경을 끼고 말씀을 보고 역사를 보며 너희 선생을 보니 그들 자신의 색안경이 자기 자신에게 독이 되어 눈이 먼 것이다. 눈이 멀었으니 보지 못하는 진리의 시대의 소경이 되었구나. 진실을 보지 못하니 바로 말하지도 못한다. 눈 먼 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 또한 그들과 같은 썩은 동아줄을 잡는 것과 같아서 언젠가 끊어져 죽음으로 가는 인생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나와 기도로 대화하고 너희 선생과 대화하자. 답이 4인 것을 설명할 때, 예전엔 2+2=4 임을 설명했다면 지금은 2×2=4 임을 설명하는 격과 같다. +(더하기)의 수준에서 ×(곱하기)의 수준으로 차원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답이 4임은 변함없지 않느냐. 그와 같다. 너희 선생은 언제나 그 자리 그 위치에 변함없는 답 4처럼 그리 있었고 설명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대함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너희 선생의 처함도 달라졌으니 나도 때에 맞춰 알아듣기 쉽게 다른 방법으로 설명했노라. (“예수님! 시대가 중심역사를 핍박하고 반대하고 악 평하니 너무나 어린 자들에게 밥을 줄 수 없어 밥 을 갈아 죽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섭리역사를 설명 하심도, 시대의 말씀도 갈아서 죽을 만들어 먹기 쉽 게 설명하신 것인가요? 저희들의 생명을 한명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의 표현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시대의 사람들이, 저희들이 어리지 않아서 섭리역사의 밥과 같은 말씀을 그대로 먹을 수만 있 었어도 예수님 마음 이렇게 아프시진 않으셨겠네요. 얼마나 안타까우신가요?”) 그러하다. 내가 밥만 주겠느냐? 내가 사랑하는 너희들에게 밥만 주는 신랑은 아니 다. 가지각색 귀한 천상의 음식들도 차려주고 왕들만 먹었다던 천하의 진미까지 다 줄 수 있는 나인데 내 밥과 같은 말씀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나는 너희에게 죽을 먹이며 성장하기만을 기다리는 입장이니라. 내 요리를 너희에게 다 내어주고 싶구나. (“그러면 예수님, 주방장이신 선생님께서는 벌써 예수님의 요리를 다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저희가 성장함에 따라 그때그때 저희에 맞게 요리를 해주시는 것인가 요?”) 들어봐라. 요리의 레시피를 다 아는 자로, 만들고 요리하는 솜씨가 아주 뛰어난 자가 주방장 이다. 그렇지? 요리를 표현해 내는 솜씨가 감각적이고 또한 미각도 뛰어나고 손맛도 좋은 자다. 어떤 요리를 만들 때 재료가 무엇이 필요한지, 싱싱한 재료는 어디 것이 좋은지, 양념이 무엇이 들어가는지. 요리 방법도 굽는지 찌는지 튀기는지 볶는지도 알며 요리 시간까지도 정확히 안다. 그러면 너희 선생은 어떠하겠느냐. 이와 같이 이러함을 알아라. (선생님을 위해 기도하는데 예수님께서 선생님 중 국에 홀로 계셨을 때를 조금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통과 고통 속에 너희 선생은 적어 남길 것이 없어 머릿속에 넣어 놓은 내 말씀만을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노라. 그 육신의 고통보다 말씀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음을 기억하여 라. 그렇게 지켜내 너희에게 주는 말씀이다. (저는 선생님을 부르며 선생님 위해 더더욱 기도하 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나는 괜찮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잘 적어 나에게 보내줘. 사랑해.” 하셨습니다. 너무나 슬퍼 울면서 예수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이시니 십자가의 고통을 잊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선생님의 고통도 잊으셨다면 얼 마나 좋았을까요.”) 내 사랑아 내가 내 십자가의 고통을 잊었다면 내가 어찌 너희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 겠느냐. 내가 그 고통과 바꿔 내 목숨과 바꿔 너희를 내 몸으로 샀음을 어찌 이야기 해줄 수 있었겠느냐. 너희 선생도 가슴에 심장에 육신에 쓰라리고 아픈 고통들이 모여 있기에 너희에게 이야기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을 환란을 두려움을 피한 것도 아니었고 맞서 싸워 이겨 승리했으므로 지금 이 자리 가운데 있는 것이니라. 그 고통의 대가로 너희 생명을 샀다. 너희들을 내 것으로 사기 위해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선 것이었다. 너희 선생도 자신의 목숨만 생각했다면 옆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도와 길이 지금까지도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너희 선생은 당당히 나의 역사임을 밝혔고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감에 서서 확신으로 전했노라. 이 역사를 반대하고 모르는 저들도 이 말씀을 들어 야만 구원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 시대 나의 뜻한 바를 알 수 있고 또한 자신 스스로가 역사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너희 인간 스스로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말이다. 신부야 너는 네가 서있는 길이 어디쯤 왔는지 알지 않느냐. 어려도 안다. (“네, 선생님 통해서 배웠고 또한 저도 깨달았습니 다.”) 그러하다. 말씀으로 안 것이다. 말씀으로 구원길이 어디인지 구원의 문이 어느 곳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구원의 키를 받아 구원의 문을 열 수 있는지 그리하려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은 네 선생 통해 전한 말씀 때문이다. 그러니 말씀이 생명이요 말씀을 전함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