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011.06.28 (화)
계시말씀 8c2a80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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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간구
작성일: 2011. 3. 29. (금) 2:39
작성자: 이선진 (진주 주하나교회)
[ 오늘은 어떤 이치와 진리를 깨우쳐 주실까
기대하면서 철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요즈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되찾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 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적게 되었습니다. ]
* 하나님 말씀 *
사랑아,
오늘은 사랑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잘 듣고 새기어 전해 주길 바란다.
주 여호와니라.
먼저 사랑의 속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무엇이 있을까?
(“사랑은 사람에게 원동력이 되어 주고
기반이 되어 주고 동기 유발을 해 주는 것 같습니
다.
힘들 때나 지칠 때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다시 힘이 생기고 할 의욕이 생깁니다.
그리고 때로는 육신이 고통스러워도
그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줍니다.
또한 세상 가운데에서 수많은 유혹거리들로부터
방패가 되어 주고 갑옷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사랑은 누군가에게서 다른 누군가에게로 전
해지면
그 물결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 잘 말해 주었다.
사랑은 ‘집중’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체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
마치 과녁판을 노리는 궁수의 눈처럼.
이 세상 험난한 바다 속에서
유유히 흐르는 시냇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너의 마음을 위로하며 달래 준다.
사나운 맹수들 속에
귀여운 토끼 한 마리처럼
온유하고 부드럽게
너의 마음을 다듬어준다.
나는 각자의
나를 향한 사랑의 수준에 따라 나를 드러낸다.
그 이유는 절대적 공의와 공평의 법을 지키기 위해
서이지.
나는 각자가 나를 찾는 수준으로 나타난다.
어떤 자에게는 심정으로,
어떤 자에게는 깨달음으로,
어떤 자에게는 말씀으로,
어떤 자에게는 음성으로.
나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수고하여
‘나’라는 보화를 얼마만큼 캐내느냐에 따라
나도 사랑으로 너희에게 다가간다.
잘 생각해 보아라.
각자가 스스로 찾고 간구하며 구하는 수준에 상관
없이
똑같은 사랑으로 너희에게 다가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공평이요,
차별적인 대우 아니겠느냐.
행한 대로 준다는 나의 말은
지극히 공의로우니라.
사랑을 간구한다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자.
먼저 너희는 ‘너희가 나에게 주는 사랑’의 차원을
높여 달라 간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너희에게 주는 나의 사랑’을 간구하는 것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잘 생각해 보아라.
나는 너희가 나에게 주는 사랑에 비례하여
나의 사랑을 준다.
그런데 너희가 나에게
사랑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올바른 간구이냐 올바르지 않은 간구이냐?
그보다 너희 자신이 나를 사랑하게 해 달라
간구하는 것이 옳으니라.
사랑은 말로만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으로 간구하는 것이다.
실천은 사랑을 낳는다.
오늘은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깊이 들어가 보자.
실천에는 ‘마음의 실천’이 있고
‘육의 실천’이 있다.
육의 실천은
육의 지체들을 사용하여 행하는 것으로
손으로 전도 전단지를 나누어주거나 혹은
나를 생각하며 성전을 치우는 일 등이 있고,
발품 팔아가며 생명들 만나러 가거나
전도하는 일 등이 있으며,
입으로 말씀을 전함으로
생명의 심정을 녹이는 것 등이 있는 것이다.
육의 실천들은 하나같이
그 실천들을 하고자 하여 구상하였던
마음과 생각들이 표출되고 구체화된 것들이다.
영으로부터 출발한 ‘실천의 동기’
즉, 감동이 혼을 타고 육으로 표출되는 것이니
육의 실천들이 혼과 영에게 영향을 주는 이유도
그 출발점이 ‘영’이라는 것에 있다.
이는 뿌리, 줄기, 잎으로 표현할 수 있겠구나.
먼저 실천의 기준이 되는 영적 말씀인 ‘물’이
‘영’이라 말할 수 있는 뿌리에 의해 흡수되어
공급의 매개체인 줄기 즉, ‘혼’을 통해 전해 받아
그 물을 먹고 성장하는 과정 즉, ‘육의 실천’을 통
하여
잎으로 결실되어지는 것이다.
실천의 열매라 할 수 있는 ‘잎’은
그저 미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을 통하여 자라난 ‘잎’은
다시 태양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여 에너지를
비축하여
줄기인 ‘혼’과 뿌리인 ‘영’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영, 혼, 육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서로 서로 영향을 주며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혼자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가 성장하면
다른 것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성장하게 해 주고
하나가 성장을 멈추면
다른 것들도 따라서 성장이 둔해지거나
멈추게 되는 원리이다.
이처럼 너희가 실천하면 할수록
너희의 실천의 열매 ‘잎’은
더욱 더 성장하여 무럭무럭 자라나
꽃도 피우며 맛있는 열매도 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무엇으로 비유될 수 있겠느냐.
바로 ‘너와 나의 사랑의 성장 과정’이다.
네가 열심히 행하면 행할수록 더더욱 빨리 성장하
여
너와 나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네, 하나님.
하나님이 안 느껴지고 사랑도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에
아무리 스스로 제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보
려고
마음을 자극시키고 난리를 쳐도 안 되었는데
육의 실천을 통하여 어느 샌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제 마음 속에
싹 틔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마음의 실천이다.
마음은 하나의 ‘구체’와도 같기 때문에
얼마든지 네가 굴리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한다고 하였지.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아
이쪽으로 불면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불면 저쪽으로 간다.
그와 같이 마음이 둘 중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을
‘실천’이라 말할 수 있는데
‘나’의 방향으로만 나아오게 하는 것을
‘마음의 실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실천은
지속적,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갈대에 계속하여 바람을 불어 주지 않으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다.
그때 사탄은 ‘이때다’하며
너의 마음의 갈대에 바람을 불어
어김없이 세상 쪽으로 향하게 한다.
이처럼 마음의 실천은 육의 실천과는 다르게
24시간 지속적으로 틈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육의 실천 간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기 마련이지만
마음의 실천 간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육에는 육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
잠을 자며 육적 휴식을 취하는 시간 등으로
시간의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마음에는 시간의 간격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마음의 실천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잘 때는 뇌도 쉬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실천에도 시간의 간격이 있는 것이잖아
요?”)
뇌가 쉬는 것이지 멈춘 것이냐.
뇌가 멈춘 것이 아니기에
너의 무의식이 표출되어 꿈으로 나타나기도 하지
않느냐.
이처럼 뇌는 쉬면서도
동시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물론 뇌가 쉬지 않고 계속 일하는 것은
맞지만
아까 말씀하셨듯이
마음의 갈대를 하나님 방향으로 계속 바람을 부는
실천은
자유의지적인 의지로 하는 것이잖아요.
잠을 잘 때의 뇌는 저의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 작용으로 움직이는 것이잖아요.”)
뇌의 사고에는 ‘경향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네가 잠에서 깨어 있을 때
너의 뇌를 어떠한 방향으로 썼느냐에 따라
‘그 방향으로의 경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깨어 있을 때의 마음의 실천이
뇌의 ‘어떤 한 방향으로의 경향성’을 만들어 놓고
네가 잠을 잘 때에는
그 경향성대로 뇌가 움직이게 되는 것이니
실상 ‘자체적 작용’이 아니라
‘너의 자유의지에 의한 마음의 실천’이니라.
예를 들어 보자.
네가 하루 종일 이성 생각만 하였다 치자.
그러면 꿈에 무엇이 나타나겠느냐.
이성이나 음란 사탄들이 나타나 너를 괴롭힐 것이
다.
너의 뇌의 경향성이 이성, 음란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하루 종일 음식 생각만 해 보아라.
꿈에 음식들이 잔뜩 나타나지 않겠느냐.
반면에 하루 종일 나에 대한 생각이나
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아 보아라.
꿈에 무엇이 보이겠느냐.
바로 나의 아들 예수나 나, 또는
성령이나 선생이 보이지 않겠느냐.
또한 나에 관한 것들이나
내가 주는 꿈 계시를 보지 않겠느냐.
그처럼 하루 종일 어떻게 마음의 실천을 하였는가
에 따라
그 날의 뇌의 경향성도 결정되는 것이다.
(“뇌를 이처럼 멈추지 않고 평생 움직이게 만드신
이유는
인간과 하늘의 끊임없는 소통을 위해서입니까?”)
나는 어떠한 생명이든
그 생이 다할 때까지
뇌가 멈추지 않도록 창조하였다.
그리함으로 온 대지와 바다에 있는
뇌가 있는 생물들을 다스리고 주관한다.
이 뇌에 나의 감동을 보내어
그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지혜롭게 창조하였으며
가장 많은 자유의지를 허락한 인간의 뇌만이
그 뇌를 창조한 목적과 가장 다르게 살고 있노라.
유일하게 인간의 뇌만이
영적인 것을 느끼고 감지하며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뇌’만이 계속해서 더 차원을 높이는 것을
갈망하고 바라게 하였다.
그러니 인간을 제외한 동물과 식물들의 세계의 양
상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지 않느냐.
(“그렇지만 하나님,
저들도 진화라는 것을 하지 않습니까?
동식물들 모두 환경에 의한 또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질이 변하는 진화를 하지 않나요?”)
인간과 저들 모두 ‘변화’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창조적이냐 아니면
수동적이냐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인간들에게는 창조력을 주었기에
계속해서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고 짓고자 하는
창조적인 욕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동식물들은
그들 스스로 주체적인 변화를 꾀하기보단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변화
즉, 시・공간적 환경이 변화하니까 하는 변
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시・공간적 제약에도 불구
하고
어떻게 해서든 이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창조를 계속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핸드폰, 인터넷, 비행기, 자동차, 배,
지하철, 텔레비전 등을 만들어서
시・공간적 제약을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요?”)
그래.
이러한 변화가 나의 뜻에 의한 변화는 맞지만
이를 위한 창조물들의 용도와 만들어진 목적은
나의 뜻과 멀다.
나는 인간의 뇌를 창조하고
그 안에 자유의지와 창조력을 넣어 주었을 때
오직 나와의 사랑만을 위하여 그렇게 만들어 준 것
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오직 자신들의 쾌락과 즐거움만을 위하여
그 아까운 뇌를 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겠느냐.
오직 나와의 사랑의 소통만을 위하여,
계속하여 사랑의 차원을 높이라고
그러한 뇌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24시간 온전히 나와의 사랑만을 위하여
그 뇌를 창조해 주었건만
인간들은 오직 쾌락을 위한 뇌로서 사용하고 있구
나.
뇌의 창조목적을 안 너희라도
뇌 즉, 마음을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여
나와의 사랑만을 위하여 쓰도록 하여라.
뇌는 창조주인 나 여호와와의
최고의 소통의 도구이다.
마음을 항상 나에게 집중시키고 향하게 하는
마음의 실천을 온전히 하여라.
그래야 뇌도 창조목적대로 잘 쓰는 것이고
나와의 사랑도 차원이 높아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위한 뇌를 이
용하여
끊임없는 마음의 실천과
육신의 한계가 있는 육의 실천 둘 다 하는 것이
하나님께 사랑을 실천으로 간구하는 것이군요?”)
그렇지.
이와 같이 마음 실천, 육의 실천을 통하여
사랑을 간구하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항상
나와의 사랑에 집중하고
사랑을 갈망하여라.
그리고 육으로는
오직 사랑만을 위한 실천을 하여라.
육으로 마음으로 나와의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목적삼아 삶을 살아 나아가라.
그랬을 때 네가 진정으로
나와의 사랑을 갈망하며 바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니라. 알겠느냐.
그리하였을 때 너의 나를 향한 사랑이
차원 높여 성장하고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맞추어 나도 사랑을 준다.
지혜롭게 사랑을 간구하여라.
주 여호와니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