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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2013.11.22 (금)

금요 명설교 bc5eaa33

선포일
2013.11.22 (금)
성경 본문
요한복음 1장 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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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22일 금요 명강의 명설교 2006년 10월 8일 주일말씀> 와서 보아라 본문: 요한복음 1장 43-51절, (참고) 요한계시록 14장 18절, 마태복음 7장 7절, 요한복음 15장 5절 <요 1:43-51>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계 14: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할렐루야! 다시 주일단상에서 우리 세계 각 나라의 여러분을 또 뵙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잘 있었어요. 오늘 여러분 한번 보세요. 단상이 다시 달라지고 뭔가 배경이 달라졌는데, 무르익어가는 가을 하면 어디 어디 해도 내 고향 성지땅 감나무골짝, 그리고 푸른 잔디, 그리고 기암절벽이 생각납니다. 또 한 달 동안은 이상적으로 이 배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기대하시고 본문말씀을 보겠습니다. 본문말씀은 요한복음 1장 43절부터 51절까지입니다. 자, 그러면 본문말씀을 볼까요. 나머지 참고말씀들도 있습니다. 참고말씀으로는 요한계시록 14장 18절, 그리고 마태복음 7장 7절,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5절입니다. 참고말씀은 읽지 않겠습니다. 본문에 해당되는 말씀을 죽 봉독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43절 이하입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세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51절까지 본문말씀을 모두 읽어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3절 이하 51절까지를 본문으로 삼고, 요한계시록 14장 18절에도 참고라기보다 본문에 해당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에 이어서 계속 연속되는 말씀인데, 그 말씀은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포도송이가 익었느니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요한복음 15장 5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느니라.” 이런 말씀들이 본문말씀입니다. 말씀 중에 나오겠지만 모두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단상이 새로워지듯 여러분도 또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전에는 성경을 놓고 물 그릇 놓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렇게 구상을 했습니다. 하늘의 구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배경을 만들고 단상을 만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좋지요.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이것을 사러 간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사러 갔었습니다. ‘주일날 꽃을 갖다가 어디 꽂아야 되겠는데...’ 하고 꽃집에 가서 보고 번뜩 생각이 났습니다. ‘이것 가져다가 컴퓨터 놓고 치면 되겠다.’ 하는 순간에 단상 생각이 번뜩 났습니다. ‘아, 이것은 오늘 나와 같이 동행하시는 주님께서 단상을 마련하자고 하는 것이구나!’ 해서 자연스러운 단상을 마련했습니다. 사이사이마다 꽃꽂이를 했는데 멋있게 했지요. 가을이 되니까 들국화, 가을이 되니까 빨간 달리아가 잘 어울립니다. 신입생들 때문에 인사를 먼저 하겠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과 인사 먼저 하고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여러분들, 이렇게 왔든 저렇게 왔든 오늘 교회로 다시 달려온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오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냥은 못 옵니다. 우리가 그냥 오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전해주지만, 하나님은 천왕의 왕이시고 천주의 근본자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같이 그렇게 히적부적 일을 안 하시고 완벽하게 하십니다. “미리는 왜 만들었냐. 센티는 왜 만들었냐. 자는 왜 만들었냐. 미리까지, 센티까지 정확하게 계산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냐. 그리고 킬로수는 왜 만들었냐. 금을 달 때, 보석을 달 때 그램, 돈, 푼까지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느냐. 돈을 왜 높은 단위로부터 낮은 단위까지 만들었냐. 그에 해당되게끔 정확하게 쓰려고 만든 것이 아니냐. 나 여호와도 그와 같이 정확하게 하려고, 온 인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깨닫게 하려고 만물도 있는 대로 다 만들어 놓고 필요한 대로 다 만들어 놓았고, 인생도 할 수 있는 것까지 다 하도록 갖은 지체를 다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 인생 중에서 지체가 없이 만들어진 자가 있느냐. 지체가 없는 자는 불구자야 그렇지. 인생들이 다 정상으로 나면 지체가 다 있는 거지. 하나도 빠짐없이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나 여호와는 모든 것을 다 이렇게 해놓았으니까 정확하게 계산하겠다. 내가 다 해줄 것은 해주었으니까. 내가 해줄 것은 인류에게 다 해주었으니까 내가 정확하게 계산하겠다. 근으로 달 때는 근으로 달아보고.” 그래서 어느 때는 하나님이 무게를 근으로 달아봅니다. 우리의 의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근으로 달아서 그것이 딸리면 안 됩니다. 의의 무게가 한 푼이라도 모자라면 심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의를 행한 길이가 1미리라도 모자라면 또 심판에 들어갑니다. 1미리 넘어가면 축복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계산한다.”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그냥 온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께서 불러서 왔다고 하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온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냥은 절대로 올 수가 없습니다. 만일 내 제자 가운데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왔으면 바로 보냅니다. 나도 그러한데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안 부르고 왔다면 하나님이 거기에 마음이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꼭 불러서 일단 교회에 왔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친구 따라 왔든지, 우연 같이 교회를 들어와서 왔든지 하나님이 부른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을 붙잡고 “나, 하나님을 믿고 영원히 이 길을 가겠다”고 서약 아니라 맹세 아니라 다 해야 됩니다. 찬스는 이 때입니다. 기회는 이 때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을 붙잡고 딱 연결시켜 역사하며 나가야 됩니다. 사람들은 기회가 오는데 기회를 모릅니다. 그런데 기회가 오기 전에는 기회를 뭔가 또 아는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기회를 달라고 하고 좋은 찬스를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은 압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을 때는 그것을 또 모릅니다. 그래서 “참, 인생의 무지한 폐단이다.” 그럽니다. 선생은 왜 이렇게 잘 아는가 하면, 하나님과 의논하고 도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차원 높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말은 한 마디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천하는 변해도 변치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들어보러 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처음 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불러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쇼부를 봐야 됩니다. “이때에 못하면 쇼부를 못 본다. 이때에 쇼부를 보라.”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하늘로부터 오는 기회입니다. 그전에 여러분이 돈 벌게 해달라, 부자 되게 해달라, 잘되게 해달라, 인생의 희노애락을 누리게 해달라 했지요. 그 기회가 이렇게 오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됩니다. 나도 그전에는 돈 벌려고, 잘 살려고 다른 것을 신경썼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것이 그 길인지를 몰랐습니다. 나는 그래서 이 길만큼은 확실히 아니까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이 길로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형통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 교회 안 다녀도 잘되잖아요.’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끝까지 잘되는지 봤습니까. 안 봤지 않습니까. 내가 한국의 유명한 손가락 꼽히는 재벌가들, 회장들을 만났을 때 자기는 교회 안 다녀도 부자 되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사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에 비해서 우리 일생 100년은 눈 깜빡할 시간이다. 1미리밖에 안 된다. 영원히 사는 영원한 세계에 비하면 1미리밖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눈 깜빡할 사이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힘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사진 찍을 때 눈 깜빡할 사이에는 싱긋 웃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런 모습을 나타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해서 이 눈 깜빡할 사이에도 이렇게 잘되게 했다.”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 하나님이 언제 나를 잘되게 했냐.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해서 잘됐지.” 자신의 손을 보이면서 “봐라. 내가 이렇게 해서 잘됐다.” 했습니다. “그것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라. 아이고, 재산이 있는 만큼 인격이 있는 줄 알았더니 재산이 있는 만큼 인격이 없다.” 내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양심을 찌르는 이야기를 했더니만 그때부터 다시 깨닫고 했지만 그 순간뿐이었습니다. 결국 여생은 하나님을 안 믿고 그냥 끝나고 마지막에 결국 본인도 모든 사람들이 볼 때 “너무 안쓰럽다. 너무 안타깝다. 불쌍하다.” 그렇게 돼버렸고 그 자녀권들도 결국은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그가 경영하는 것도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내 입에서 한번 나간 말은 한 번도 다르게 된 일이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내 입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데에 겁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 날아오면 이렇게 막고 저렇게 막고 막아야 됩니다. 안 막으면 안 됩니다. 우리 처음 온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께서 불러서 왔습니다. 우연같이 불러서 온 것입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연 철학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개똥철학이라고 합니다. 우연같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밀하게 불러서 왔습니다. 그것을 내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것을 압니다. 이때를 기회로 해서 딱 잡고 늘어져야 됩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왔구나.’ 하는 것은 조금, 100만분의 1밖에 생각이 안 납니다. 그것을 만족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이 근본입니다. 그로 인해서 내가 가르쳐주게 된 것입니다. 오늘 모두 처음 오신 분들, 또 한 주일 동안 살면서 서로 만난 제자들, 우리 악수하고 또 주일말씀을 듣겠습니다. 악수하겠습니다. 전부다 하늘을 대신해서 악수해 줬으니까 이 악수가 악을 멸하고 선으로 가고 이제부터 말씀을 출발하겠습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이 나올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먼저 설명을 해주겠습니다. 천천히 하는 것은 온 지구상에 있는 나라들, 40개에서 50개 나라들에게 말씀이 가면 거기에서 통역을 해줘야 되기 때문에 천천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말하기를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그래서 “네.” 하고 따랐습니다. 바로 가서 따르면서 나중에 예수님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은 아주 축소시켜서 썼기 때문에 그 행적을 200자 쓸 것을 10자 쓰고 끝났습니다. 축소시켜서 썼기 때문에 그 내용을 어떻게 푸느냐가 참 어렵습니다. 빌립에게 따르라 했는데, 좇으면서 이미 주님을 알고 메시아를 깨닫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빌립에게 있었던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나다나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다나엘에게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모세는 구약시대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인도하던 자입니다. 모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르기를, “모세도 말하고 선지자들도 말하지 않았느냐.” 선지자가 누구인지 알지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예언해주는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100년, 혹은 300년, 400년에 하나씩 보내시는 선지자들에게도 말했지만 모세가 예언하고 선지자들이 구약에서 예언한 사람이 나타났다. 메시아가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타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나사렛 예수여. 요셉이 아들 나사렛 예수다.” 그랬더니, “아니, 나사렛에서 누가 났단 말이냐.” 그랬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이미 믿고 있는 제사장 사가랴래.” 했으면 “아, 그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골 두메 산골짜기 나사렛에 있는 예수가 알고 보니까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다.” 하니까 나다나엘이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한번 생각해 봐라. 그런 산골짜기에서. 뜻도 없는 곳이 아니냐.”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빌립이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이미 깨닫고 예수님을 알고 확신했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했는가 하면, “나다나엘아, 와보라. 와보라 한번. 가보면 될 것 아니냐. 저기 있으니까 가봐라. 만나 봐라.” 하니까 결국 나다나엘은 “그래. 가보자. 참.” 하고 가봤습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손에 이끌리어 갔는데 예수님이 보시고 “나다나엘아.” 하고 부르니까 대답하면서 응했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너는 참으로 오리지널 이스라엘 사람이다. 민족을 알고 구하고 참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다.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간사한 것이 너무 많고 여우 짓 하는 놈이 너무 많은데 너는 참으로 그렇지 않다.” 그랬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 마음을 너무 확실하게 아니까 너무 놀랐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했습니다. 자기는 자기 자신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너, 지금 아는 것이 아니라 아까 무화과나무 밑에 있다가 왔지.” “아니, 어떻게 무화과나무 밑에 있다가 온 것을 아십니까.” 같이 있던 자가 아직 전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빌립이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데리고 오던 길로 그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삐삐 시대도 아니고 핸드폰 시대도 아니고 전화시대도 아니고 무전기연락 시대가 아니라 미리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요새는 미리 연락을 해주지 않습니까. 지금은 선생님에게 미리 연락을 할 수 있지만 전화가 안 통하니까 못합니다. 선생님이 제자들의 소식을 받기 전에 내가 미리 알아서 편지하면 그 편지를 받고 모두 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의 심정을 이렇게 아시고 편지가 오는가.’ 합니다.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해서 네가 나를 인정을 하느냐.” 말씀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기를 꿰뚫어 아시고 무화과나무 아래 위치에 있었던 것도 아시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전도를 하려면 사람이 투시력이 있어야 되고 마음을 읽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참 무섭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단계에서는 할 수 없지만 나다나엘을 데리고 오는 빌립 정도만 하면 됩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빌립 같이 확실히 예수님을 알고 메시아를 알고서 누가 이야기하면 감히 가서 건들어야 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메시아가 왔다. 메시아가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 모세는 우리 형제 가운데 온다고 했다. 선지자들은 구름 타고 온다고 하고 이스라엘 나라의 상공에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가 왔다.” 이렇게 증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전도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도가 굉장히 잘 안 되고 힘들 때에 있는데, 전도하다 보면 이 빌립의 전도의 비법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데려올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이 자기를 이렇게 읽고 자기를 확실히 가르쳐주니까 예수님께 말하기를, 예수님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것도 알고, 자기가 참으로 간사함이 없는 것을 누구는 몰라도 자기는 아는데, 나다나엘은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이리 휘뚝 저리 휘뚝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한 자였습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이 이야기하니까 나다나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했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고 현장에서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빨랐습니다. 선생도 말씀을 하다 보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고백하는 편지들이 옵니다. “처음 만났는데 오늘 설교 듣고 참으로 당신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 것을 확신합니다.” 합니다. 그러면 나를 무슨 사탄이 보낸 것으로 알았습니까. 스스로 된 것으로 알았던가 봅니다. 스스로 이렇게 하려고 해서 한 것으로 알았나 봅니다. “하나님이 보내서 이렇게 인류에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는 것을 아나이다.” 이런 식의 편지가 많이 옵니다. 요즘도 보면 한창 전도되어서 이것저것 별 스토리가 많이 있습니다. 다는 내가 이야기할 수 없는데, 쫓아와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확실하다. 온 인류가 일어나서 그렇게 핍박하는 것을 보니 꼭 예수 때가 생각난다. 나는 무신론인데.”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제자들이 듣고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아니고 사회의 이렇다 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복음을 전하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 번에 편지로 고해 왔습니다. “나는 당신을 믿고 따라가니 나를 구원을 꼭 시킬 자로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다시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나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 해서 보면 일반 청년들이나 10대들이 아니고 아주 어른들이고, 사회에서 이렇다 할 만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만큼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니까 그 복음을 듣고 고백을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힘있게, 사람들이 성질머리가 있는 사람에게는 성질머리가 있게 전하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뭔가 과감하게 해야지 이런 나무도 멋있게 조각할 때 톱질을 슬슬 했다가는 하루 종일 해도 안 끝납니다. 꾹꾹 눌러서 해야 30초, 20초에 끊어집니다. 복음의 말씀도 강하게 쿡쿡 찔러대야 즉시즉시 깨닫게 되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계속 말하기를, “당신은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요, 임금이요, 참으로 임금이로소이다. 당신이 바로 임금입니다. 지금 헤롯이 왕을 하고 있는데 그건 세상적인 왕이고, 정말로 이스라엘 나라에 당신이 임금입니다. 당신이 왕입니다.”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알아줘야 됩니다. 마음을 알아주고 가르쳐야 “바로 그분이 지도자가 아닙니까.” 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감격하면서 이야기했을 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나다나엘아, 네가 더 큰 것을 볼 날이 있으리라. 가라사대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옆에, 자기 앞에 왔다갔다 하는 것도 볼 것이다. 그것을 봐야 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봤습니까. 예수님 때는 예수님에게 그러했고, 선생님은 그것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구세주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메시아인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전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데 왜 내게 구원을 주냐. 어떻게. 이스라엘 나라 사람인데...’ 생각했습니다. “온 인류는 한 지체요, 그 중에 머리는 하나요.” 하듯이 온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자를 보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는 이스라엘 나라에 해당되는 구세주를 보내고,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에 해당되는 구세주를 보내야지 왜 이스라엘 나라 사람을 우리 구원주로 하냐.’ 내 생각에는 그랬습니다. 세계를 크게 못 봤던 것입니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세계를 하나로 못 봤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도 교회를 다니기는 다녔는데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내 메시아냐.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인데.’ 그 후에 알고 보니까 온 인류의 메시아니까 하나씩 보냈던 것입니다. 결국 ‘세계를 한 가정으로 보고, 한 사람에게 의학을 가르쳐 의술을 가르쳐서 집 전체의 식구들의 병을 다 책임지게 하듯이 그런 입장이었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나에게 구세주이고 온 인류에게 구세주가 되셨구나.’ 하는 것을 확신하며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해서 어떻게 해서 구세주가 된 것을 알았을 때는 ‘아하, 그래서 메시아가 예수님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도 금방 안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확신을 한 것은 자꾸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깨닫고 몸부림쳐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노상에 다니면서 1년에 1만 명이상 청강생을 남기면서 계속 전도하고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내가 아니까 그럴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뭔가 확실히 알아야 그렇게 전도하고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모르면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15장 5절에,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이렇게 해야 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하나 되어야 돼.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고 모든 것이 잘될 수 있다. 나무와 가지가 끊어지면 안 된다.” 했습니다. 여러분, 전도 많이 하려면 나와 일체되어야 됩니다. 일체되어야 많은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나를 확실히 누군지 알아야 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 본문말씀을 전하면서 오늘 말씀을 이야기했는데 시대의 말씀으로 돌려 볼진대, 오늘 주제의 말씀은 “와서 보아라.” 이렇게 하면 됩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니까 “와서 보아라.”, 예수님이 옆에 있으니까 “와서 보아라.”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나머지 일은 예수님이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와보면 예수님이 구원주라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압니다. 이런 나무를 조각하는 사람들은 딱 쳐다보면 ‘이 나무는 어떻게 조각해야 되겠다.’ 하고 알듯이 압니다. 집을 여기에 지으려면 ‘아, 지형이 이렇게 생겼으니 방향은 어디로 틀어야 되겠다.’ 이것은 다 알지 않습니까. 100명이면 100명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조각하는 사람들은 ‘돌이 이렇게 생겼으니까 1미터 돌이면 잘하면 한 90센티 조각이 나오겠다. 어떻게 뜨면 되겠다. 앉아 있는 조각을 만든다, 서 있는 조각을 만들어야 되겠다.’ 이것은 뻔히 보는 대로 알 수 있듯이 예수님도 척 쳐다보면 어떻게 요리할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상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각 나라, 수십 개 나라 사람들이 듣고 있어도 개인마다 어떻게 말씀이 갈 것을 다 아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빌립처럼 이렇게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많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줘야 됩니다. 전도를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선생님에게 편지 오는 것을 보면, “선생님, 정말 나는 전도하고 싶고 정말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할 때는 “내 말씀을 늘 들어봐라. 그리고 기도도 해. 그러면서 하는 거야. 전도는 어떤 한 사람을 두고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야. 인류가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말씀으로 전도를 못해. 전부다 달라. 사람마다 달라. 양 다루는 것 다르고 말을 다루는 것 다르고 소를 다루는 것이 달라. 다르기 때문에 양 다루는 식으로 소를 다룰 수 없고, 소 다루는 식으로 말을 다룰 수도 없고, 말을 다루는 식으로 공작을 다룰 수가 없고, 그리고 사슴을 다룰 수가 없는 거야. 먹는 것도, 모든 것이 다 다르니까 다르게 다뤄야 돼.” 그래서 양을 각각 인도해야 된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요10:3) 예수님께서 “양을 각각 인도해야 된다. 개성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이것을 하라”가 아니라 “빌립처럼 이렇게도 해보면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옆에 있으니까 아주 쉬웠습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여러분 옆에 없지 않습니까. 없으니까 “와보라. 교회에 와보라. 그가 태어난 곳도 가보자.” 해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보면 이 말씀을 들을 것 아니겠습니까. 와서 들어보면 말씀이 별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해당도 안 되는 말씀 같은데 마음에 감동되고 조금씩 조금씩 돌아와집니다. 왜 그럴까. 진짜니까 그것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땅바닥에 물이 내려가서 물이 안 보이지만 거기에 있으면 건조기가 없어져서 건조하지 않고 습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은 굉장히 건조합니다. 그래서 사막은 건조하고 호수가 많은 지역은 물이 안 보여도 습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느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의 세계로 데려오면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와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초를 잘 해야 됩니다. 전초를 조금 하고 데리고 오면 안 됩니다. 적어도 빌립은 말하기를, “이미 4천년동안 모세를 중심해서 구약에서 예언한 그 예언,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예언이 지금 이루어졌다. 메시아가 온다고 했는데 알아보니까 나사렛 예수더라.”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나다나엘이 쇼크 받았습니다. 당장 하는 말이 “어디 그런 데서 메시아가 나냐.” 했습니다. 그래도 나다나엘은 “야, 공중에서 안 오고 땅바닥에서 왔단 말이냐. 믿을 수 없다.”고는 안 했습니다. 구약에도 똑같이 공중에서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다나엘은 그런 주관은 안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성경에 대해 어떻게 주관을 갖고 있는가, 메시아가 어떻게 출현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가 각각 알아보고서 말씀이 나가야 됩니다. 무조건 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내게는 상관없으니까.” 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먼저 분석해서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전도할 때도 하나씩 세밀하게 분석해서 거기에 답을 던져줬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했습니다. 여러분도 전도할 때 연구들을 하면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 하면 여러분들도 “와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소위 메시아라고 할 만한 자는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내고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 이들을 구원하리라.” 그랬습니다. 작고 작은 구원자들이 많았습니다. 사사들, 선지자들, 그때그때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구원을 시켰는데 모세가 대표적인 구원자였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 나 같은 선지자가 오리라.” 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 같은 큰 사람이 “너희 가운데 선지자가 오리라.” 한 것이 예수님을 두고 말한 것인지를 성경을 크게 푸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모세가 말하기를 메시아가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 선지자들도 메시아가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 구름 타고 온다, 또 하나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까 나사렛 예수다.”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쇼크를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나다나엘은 환경을 많이 보고 겉을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구름 타고 와야 되는데 구름 타고 안 왔는데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느냐.” 그러든지 “하나님이 와야 되는데 하나님이 안 왔는데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아에 관한 사상이 그런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상이 다 다르고 메시아를 맞는 관이 다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야 예수님이 다시 오기를 원하고 그가 재림주, 구세주라고 하지만 다른 종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예수님이 와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랬으면 예수님이 왔을 때 믿고 따랐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관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에는 유교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성인으로 태어난 공자를 섬기는 종교인데, 그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온다.” 하면 그를 예수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로 봤으면 그들도 예수가 2천 년 전에 왔으니까 다 믿었을 것 아닙니까. 자기 구세주관이 각각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이방 사람들은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우리같이 예수님이 다시 온다고 안 믿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도령이 온다. 정도령이 와서, 그가 참 진인으로 진리를 가르쳐서 세계를 화평케 한다.” 그렇게만 믿습니다. “전혀 공자도 아니다, 석가모니도 아니다.” 합니다. 석가모니라고 했으면 석가가 나타날 때 석가에게 갈 것 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정도령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메시아관이 각각 다릅니다. 여러분 각 나라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하러 온다는 사람을 누구로 봅니까. 여러분이나 교회 다니니까 예수가 다시 온다고 생각하면서 쳐다보고 있지 다른 종교나 이방의 종교에서는 자기가 믿는 사람이 다시 온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온다’, ‘구세주가 온다’는 말을 쓰기는 씁니다. 기독교는 재림주가 온다고 하는데, ‘재림주는 어느 산에서 온다.’고 해도 그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기다리는 구세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를 우리 세계의 모든 제자들이 배워야 되는데, 한국문화를 이야기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있는 종교들 중에는 증산교, 대순진리교, 이런 종교가 굉장히 큽니다. 그들은 구세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믿는 증산 선생이 다시 온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가 왔어도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별 상관이 없습니다. 메시아가 왔다고 해도 안 믿습니다. 기독교 같은 데는 메시아가 왔다고 해도 왜 안 오는가 하면 자기가 기다리는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A라는 사람은 이 사람을 자기의 배우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맞고 가는데 다른 사람이 “어, 나도 맞아야지.”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내 배우자는 다른 데에 있다.’ 하고 다른 데를 쳐다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배우자는 키가 작고 예뻐. 저 배우자는 키가 크고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예 안 통합니다. 구세주는 딱 하나를 보냅니다. 하나를 보내서 세계 전체를 통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머리가 하나이듯이 온 인류에게 딱 한 분을 보내서 그분이 그 시대를 어느 시대까지 끌고 나갑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에 4천년 동안 모세를 중심해서 끌고 갔습니다. 신약의 역사는 2천년 동안 예수님을 중심해서 끌고 가고, 성경을 보면 천년 동안 또 다른 사람을 구원자로 세워서 끌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 그 당세에 두 명, 세 명이 없습니다. 당세에는 메시아가 두 명도 없고 세 명도 없고 딱 하나입니다. 그를 사람들이 기다리게 되었고, 그가 구원주가 된 것입니다. 나머지 이방의 종교에서 자기가 믿는 자가 온다고 기다리지만, 저희들이 기다리는 구세주지 하나님이 보내는 그 구세주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를 다 믿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내내 그 사람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진인이라고 하고, 정도령이라고 하고 재림주라고 하고 신공자라 하고 한 사람을 가지고 다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 앞에 가면 불교인이 되었든 유교인이 되었든 다 구원을 시킵니다.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구원주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의사면 대 수술을 세계적으로 하니까 그에게 가면 불교가 되었든, 유교가 되었든, 이방종교가 되었든, 미신 섬기는 사람이 되었든, 기독교가 되었든 누구든지 다 갖다놓으면 다 수술을 해서 고쳐놓듯이 구원주는 그런 입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서 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과 일체되어서 하는 일들입니다. 그것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대개 보면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 구원자를 기다립니다. 구원자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가서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빌립같이 전하면서 “너희들이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나를 따르라.” 해서 여러분을 따르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이 빌립처럼 가서 “예수님이 예언하고 선지자들이 2천년 동안 예언한 구세주가 왔다. 보니까 월명동 그 마을에서 났다.” 그렇게 해야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쇼크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쇼크를 받고 “거기에서 무슨 사람이 왔겠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미친 사람들. 하늘에서 예수님이 와야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메시아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신공자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정도령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할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와보라.” 아마 중얼거리는 소리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 산골짜기에 뭐가 있단 말이냐. 지도상으로 봐도 주소가 복잡한 걸 보니까 너무너무 산골짝 같다.” 그러든지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게 된 여러분들은 이미 “와보라” 해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 번에 몽땅 모아놓고 1년 내 올 사람들이 다 와서 한번 들어보면 더 감동되겠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늘 매주 두 번씩 나를 통해서 말씀을 주니까 그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들이 택한 자 같으면 들어올 것입니다. 택해서 일단 왔지 않습니까. 택해서 왔는데 그래도 안 믿고 끝나버리면 그것은 본인이 책임분담을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를 가도, 지옥을 가도 원망을 못합니다. “니가 안 했잖아.” 하십니다. 예수님을 꿈에 본 신령한 사람들이 책을 쓴 것을 보면, 그가 기도하는데 예수님이 지옥을 가서 돌아다니는 모습들을 봤다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을 지옥에 가게 했냐고. 어째서. 내가 지옥에 가게 생겨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넉넉히 주님 품으로 갑니다. 저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냐고. 왜 지옥을 가게 했냐”고 예수님을 원망하는 사람을 어떻게 전도하느냐고 기도를 했을 때 예수님이 지옥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각종 고통을 받고 몸부림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고통을 받는가 하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것의 백 배, 천 배 고통을 그대로 받고 몸부림치면서 “왜, 내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고통을 받느냐. 알고나 고통 받으면 덜하겠다.” 하고 막 몸부림을 치면서 고통을 받더랍니다. 고통을 받아서 피골이 상접되고 이를 북북 갈고 하는 모습들을 자기가 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 내가 한 마디만 묻겠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구세주라고도 하고 성자인데 한 마디만 묻겠습니다. 대답 좀 해주십시오. 왜 내가 지옥을 왔습니까. 왜.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가 특별한 죄를 지은 것이 뭡니까. 한번 지적 좀 해보세요.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내가 지옥을 와서 이 고생을 받습니까.” 그 기도하던 사람이 아픈 사람을 쳐다보니까 목 양쪽으로 안에서 있던 암이 바깥으로 솟아서 마치 사과만한 것이 매달려 있어서 쑤시는 고통을 받더랍니다. 이 고통을 언제부터 받았냐고 하니까 300년 전부터 받았다고 했습니다. 300년 전에 죽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냐”고 하니까 예수님이 참 따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나 안 믿었잖아. 내가 구세주인데. 너도 방금 구세주라고 했잖아. 구세주인데 안 믿었잖아.” 안 믿으면 제대로 안 행한 것입니다. “너 안 믿었잖아. 그래서 그 죄로 간 거다.” 하셨습니다.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큰 죄도 아니었습니다. 자기는 큰 죄 지어서 그렇게 지옥 가는 줄 알았더니 ‘구세주 안 믿어서 그랬구나.’ 하고 알게 된 것입니다. 전부다 온 인류에게는 그것이 답입니다. “어, 나는 예수님 믿었는데요.” “잘 못 믿었잖아.” 2단계로는 그러실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가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자신이 죽고서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지, 그냥 보통 해서는 십자가에 안 올라갑니다. 몸값도 안 나오는데 십자가에 올라가겠습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인데 예수님은 천하를 주고 바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하를 구원시켜 주시고 구원 길을 열어달라고 너무 억울한 죽음은 할 수 없다고 하고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 메시아를 왜 죽였습니까. 메시아인지 알았는데도 죽였겠습니까. “너는 메시아가 아니다. 구름 타고 와야 되는데 어떻게 땅바닥 시골 산골짝에서 난 네가 구세주냐.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고 하늘에서 온 신 같은 자를 기다린다. 너는 나사렛에서 났고, 네 아버지가 요셉 아니냐. 하하. 목수 아니냐.” 그랬습니다. 안 믿고 불신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이 안 믿는 자들로 인해서 판국이 기울어지자 “내가 너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고 너희를 다 구원하기를 원한다. 아버지, 이들이 모르고 하는 짓이니 다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용서로 끝났습니다. 나도 제자들에게 늘 용서로 끝납니다. 왜. 행하는 대로 대하면 죽으니까 용서로 끝나는 것입니다. 부모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들이 막 뭐라고 하면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말지 않습니까. 참아주고 그냥 끝나버리고 “가자.” 합니다. 그래야 살리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를 대신 그 목숨을 받고서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었습니다. 메시아의 카드가 그렇게 큽니다. 온 인류를 위해서 목숨을 다 주어야 메시아 목숨 하나가 됩니다. 그것도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큰 일을 해놓고 구원 길을 열어 놓고 이후로 구원역사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적으로 예수님께서 용서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용서해 줬습니다. “네가 그러니까 용서해주마. 알았다. 다 용서해주마.” 용서해 줘야 되지 용서 안 해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은 다시금 또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그것으로 끝나지 거기에서 다시 오는 사람이 없더라.” 그 여자가 지옥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렇게 썼습니다. “다시금 오는 사람이 없더라.” 그리고 지옥에 간 사람에게 “너, 나를 안 믿었잖아. 구원주를 안 믿었잖아.” 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주를 안 믿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용서 길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다시금 메시아를 믿었으면 구원받았지만 안 믿었으면 구원 못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지 않습니까. 예수가 어찌어찌하다 해도 하나님이 그를 구원주로 삼아서 역사했기 때문에 그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 받을 자가 없다. 영생에 들어갈 자가 없느니라. 아무도 없다. 한 명도 없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구세주, 구세주 하는 것입니다. 구세주가 밉게 보이고 나쁘게 보이고 어쩌고 해도, 심리학상, 순간순간 자기 부족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구세주가 그렇게 밉게 보이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와서 부딪혀 보면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다 용서해줍니다. 일생동안 용서하고 또 용서해주고 갑니다. 한 번만 용서 안 해줘도 그냥 죽으니까, 육신은 살아 있어도 영혼이 다른 세계로 가니까 죽을 때까지 다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원수 용서만 하고 갑니다. 그랬는데도 안 믿고 가면 그것은 자기 책임이지 구세주 책임도 아니고 따르는 자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자기 수고와 영광도 옆의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책임 하는 것을 나쁘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책임을 주었기 때문에 자기가 해놓고 영광도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함도 자기가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한 것을 더욱 깨닫게 하고 알게 했는데, 오늘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이고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할 때 빌립처럼 전하라. 그렇게 과감하게 전할 수 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려면 그만큼 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복음을 못 전합니다. 빌립은 확실히 알았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빌립은 확실히 주를 알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확실히 아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 대해서 모르니까 못 전하는 것입니다. 행위대로 받는 것인데, 살아 있을 때 제대로 해야 죽어서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그만큼 하는 자끼리 서로 하나가 되고 그만큼 못하는 사람끼리 서로 하나가 됩니다. 그 의를 센티로 따지고 무게로 따지다시피 합니다. 모두 선생님 옆에서 죽은 후에나 살아서 살고 싶어 하지만 그 의의 무게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여튼 잘 해야 됩니다. 정말로 잘 해야 됩니다. 왜 잘해야 되는가 하면 나는 압니다. 이야기는 안 해도 알고 있습니다. 1센티만큼만 못해도 그 탕감을 받는데 7, 8개월 동안 받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는 너무 작은 것인데 그러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세계는 그렇게도 무섭습니다. 회개했는데도 그것을 받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무섭다는 것입니다. 몸부림치는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금 복직해서 또 하는 것을 봤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곁길 안 가고 발 삐끗 안 하려고 눈물겨운 고생을 하면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가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의 인식관을 보면 자기의 관들이 다 다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종교관이 다 다르고, 메시아가 오는 것을 생각하는 관도 다 다르고, 사는 관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그것을 보면서 말씀을 하면서 전도도 하고 대화를 해야 통합니다. 그전에는 잘 안 통합니다.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본문에서 나온 대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너무너무 많이 기다렸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가난하고 못 먹고 못 배우고 어렵고 고통을 받게 되니까 구세주를 누구보다도 더 많이 기다렸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오시나.’ 하고 더 기다렸습니다. ‘이제 가정에도 소망이 없고, 부모에게도 소망이 없고, 형제에게도 소망이 없고, 어떤 환경적인 것에도 소망이 없다.’ 하면서 오직 구세주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초가생가 그림>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하니, 이런 곳에서 사는데 내가 희망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런 찌그러지는 집에서 살았는데,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집을 못 지으니까 “하나님, 이거 안 찌그러지게 해달라”고는 했습니다. 비 오면 찌그러지게 생겼었습니다. 이것은 잘 그린 것입니다. 찌그러져서 곧 넘어진다고 오늘만 내일만 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비 오면 나와. 알았어, 모두. 바람 불면 양쪽의 감나무 가지가 찢어져서 그 찢어진 가지에 눌리면 바로 쓰러지니까.” 그랬습니다. 장정 하나가 밀면 그 집이 무너날 정도였습니다. 왜 그것을 놔뒀나 모르겠습니다. 이런 집에서 살았는데 내가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소망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렇다고 부모한테 의지할 수도 없고 형제한테 의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구세주만 기다린 것입니다. 막연히 하나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예수님이 온다는 말이 성경에 있으니까 그것만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달리 도와주겠지.’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오죽하면 월명동 내 고향이지만 내가 싫어했겠습니까. 너무 고통스러웠고 너무 답답하고 잡초밭에 모기등쌀이 심했습니다. 물이 있어서 모기등쌀이 아니라 잡초밭이라 모기가 너무 많았습니다. 원주민들이 살듯이 그러했습니다. 잡아서 해결될 것도 아니고 약 뿌려서 해결될 것도 아니고 그냥 뜯어 먹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우 조금 먹고 살면 모기가 다 뜯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모기를 저주해도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산골짝에 있으면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산이 가로막혀서 너무 답답했습니다. 앞산, 뒷산에 가로막히고 옆산에 가로막히고, 앞에 큰 산 30미터 앞에 가로막혀 있고 뒷산은 바로 뒤에 등지고 있었습니다. 뒷산은 그래도 등지고 있으니까 덜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에 가면 가로막히는 데를 아주 싫어합니다. 10억짜리 집이 있어도 앞이 가로막혀 있으면 나는 1억짜리 집이 훤히 펼쳐져 있는 곳으로 갑니다. 앞이 가로막히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선생님이 말씀을 전할 때나 이야기할 때 내 앞에 앉아서 내 시야를 가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절대 가리지 마라. 나는 그것을 싫어하니까.” 그럽니다. 너무 답답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국의 세계를 벗어나서 세계로 나와서 일을 하게 해서 신앙적으로는 특별히 가로막히는 것이 없습니다. 어디에 가 있어도 임시 잠깐은 모르지만 가로막히는 곳에는 한동안 있지를 않습니다. 내가 싫어하니까 반드시 시야가 터진 데로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가 싫어하는 곳으로 안 보내십니다. 여러분도 시야가 가로막혀 있는 집이나 시야가 가로막혀 있는 환경은 정말 싫어할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는 사람들이 나를 막고 반대하면 내가 더 올라가서 쳐다보기 때문에 덜하지만,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창문도 조그마한 것은 싫어합니다. 영창 같고 감옥 같아서 싫습니다. 그저 한쪽으로는 확 터놔서 다 보여야 됩니다. 그래서 월명동의 집은 내가 확 보이라고 문을 많이 만들어 놨습니다. 내 고향 월명동 초가집을 벗어나서 5칸 집을 지었지 않습니까. 그 집은 문이 많아서 벽이 얼마 없습니다. 하도 가리는 것을 너무 싫어하니까 그렇게 지었스니다. 그렇다고 바닷가에 가서 집 짓고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닷가에는 계속 있으면 염분기로 뒤덮이니까 싫습니다. 아마 월명동에서 누가 났다고 하면 월명동에 와보지도 않고 뭐가 났겠냐 할 것입니다. 주소가 복잡하고 길이가 길면 무조건 거기는 산골짝입니다. 우리 월명동 골짜기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 월명동 151번지, 이렇게 7단계를 들어갑니다. 복잡하니까 산골짜기입니다. 군대에 갔을 때도 소대장이나 분대장이 “네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니 주소가 복잡하니까 “아주 산골짜기 촌놈이구먼.” 그랬습니다. “분대장은 주소가 어떻게 돼요.” 하니까 “서울.” 그냥 그랬습니다. 나는 “달밝골” 하면 모르니까 주소를 다 대야 하지만 서울 사람은 “서울.”, 전주 사람은 “전주.”, 대전 사람은 “대전.” 그냥 그래 버렸습니다. 나는 그 복잡한 주소를 다 대야 했습니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 달밝골” 하고 아주 복잡하게 이름을 대니까 “아휴, 거기 찾아가지도 못하겠다. 제대하면 찾아가려고 했더니 못 찾아가겠다. 너 있는 데에 감이 많다고 가고 싶은데...” 그랬습니다. 월명동에서 하나님의 보낸 자가 나타났다고 하면 아마 사람들이 콧방귀를 뀌면서 “그 산골짝에서 누가 나타났단 말이냐.” 할 것입니다. 서울에서 하나님이 보낸 자가 나타났다고 하면 “서울에서.”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신약 시대 때에 예언한 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명석이래.” 그러면 아마 사람들이 하도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는 이단이잖아. 이단의 괴수잖아.” 막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단이라고 하고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내가 할 것 다 하고 이길 것 다 이깁니다. 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금에다가 아무리 먹칠을 해 놓고 금에다가 아무리 인분 칠을 해놓고 개똥 칠을 해놔도 금은 금이라는 것입니다. 딱 씻으면 번쩍번쩍 금이고, 씻으면 또 금입니다. 그리고 또 아무리 씻어도 안 되면 갖다가 용광로에 집어쳐 넣으면 다른 것은 같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 금만 나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내가 하나님이 보낸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온 사람이라면 그것에 전혀 끄떡도 안 합니다. 반대하던 사람들은 반대하다가 늙습니다. 그런데 반대도 계속은 못 합니다. 나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으로 쳐보면 다 없어져서 이제 없습니다. 또 새로 반대하는 사람이 요새 나타나서 하는데, 그것도 내가 시간을 압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언제까지 어떻게 쇼부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들을 구원하려면 기도는 항상 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2배, 3배, 10배, 20배 더 들어갑니다. 그러느니 다른 사람을 기도해서 구원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을 때 “묻지 말고 너의 일을 하라. 과거에도 너희를 괴롭히는 자들, 복음을 못 전하게 한 자들은 또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 나를 따라라. 부지런히.”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사명을 맡고 오는 사람은 하는 대로 다 합니다. <월명동 개발 전 전경사진> 그 밑에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런 데서 하나님이 보낸 자가 나타났다고 하면 아마 환경부터도 안 믿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생겼으니 이런 산골짜기에서 누가 났다고 하면 누가 믿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이곳에서 났다고 하면 “하나님이 정말로 눈이 조금밖에 안 떴는가 보네. 여기밖에 안 보이게. 큰 데가 안 보인 거 보니까.” 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집도 새로 지어서 깨끗하게 해놓은 집입니다. 그 옛날 집을 때려 부수고 잘 깨끗하게 지은 것입니다. 목숨을 걸어 놓고 지은 것입니다. 월남에서 벌어 온 돈 가지고 깨끗하게 지은 것입니다. 교회 지을 것만 남겨 놓고 그 나름대로 몸부림치면서 지은 것입니다. 이 환경 이야기를 하면, “그 산골짜기에서 누가 나타난단 말이냐.” 합니다. 왜냐하면 산골짜기 하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못 배웠다, 불쌍하다, 무식하다 그것만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났다고 하니까 “아, 거기 나사렛 무식한 동넨데. 못 배운 동넨데.”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나사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월명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의 세계를 생각하면 사람들이 그럽니다. “거기는 못 배운다. 거기는 가난하다. 거기는 불쌍하다.” 사람이 가난하면 제대로 생각을 못하고, 돈이 없으면 제대로 배우지 못하니까 “그런 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날 수 있냐. 하나님의 사람은 알고 배우고 터득하고 세상 것도 다 배우고 하늘 것도 배우고 나타나지 않겠냐.”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옛날이 아니고 지금에 와서는 또 다르다는 것입니다. <월명동 자연성전 전경사진> 그러듯이 이렇게 보면 또 다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놨을 때는 “아, 여기서 누가 났구나.” 합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이곳에 와보면 “여기에 누가 나타났구먼. 누가 났구먼.” 그럽니다. “저 집은 어떤 집이여. 큰 사람이 났구먼. 이렇게 해 놓고 사는 것 보니까.” 당장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가 나타났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월명동에 가보면 “여기에서 누가 났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거기를 멋있게 만들어 놓고 그 이야기를 하면 “여기에 누가 나타났네. 여기에 큰 사람이 태어났구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 놨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만들어 놓지도 않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자기 애인이라도 만들어 놓지 않았으면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도 안 찌우고, 배우지도 못 배우고, 매너가 빵점이면 애인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만들어 놓고 칭찬해야 됩니다. 그 전에 칭찬하면 사람들이 보고서 실망하고 “아니다.” 하고 선생님부터도 우습게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만들어 놓지 않았을 때 나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의 말을 안 믿고 여러분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들어 놔서 보여주니까 보는 것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말씀을 단상의 말씀에서부터 여러 종류로 말씀을 다양하게 해서 여러분들이 “너무 좋다. 야, 다양하다. 너무 좋다!” 하는데, 말씀이 잘 들리지요. 말씀할 때 쉽게 하고, 그리고 예수님 것을 죽 해주고, 우리 시대 것을 안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남의 머리만 긁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내 머리도 긁어야 됩니다. 남만 밥 해주면 되겠습니까. 자기도 먹어야 됩니다. 아무리 식모라도 주인에게 밥 해주고 자기도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늘과 같이 신부 되어서 사는데 신랑도 대접하고 신부도 해야 됩니다. 반드시 두 가지를 꼭 합니다. 기독교에서 나를 이단시 하고 신문에도 내고 만날 그럽니다. 그런데 이단시하면서 아예 보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와 보라. 봐라.” 했더니 와서 내가 동영상으로 설교하는 것을 보고는 “설교는 제일 잘하는구먼. 이단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설교는 제일 잘한다. 우리는 설교할 것이 없어서 그러는데.” 그러더랍니다. 왜. 새로운 역사치를 보고 설교하니까 끝이 없습니다. 그들은 옛날 것만 하니까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나의 설교는 흠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야기해 주지, 본문말씀 해주지 하니까 흠을 못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다른 정말 이단들 종교 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반드시 보냄을 받은 자는 자기를 보낸 자를 증거한다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자기를 보낸 자를 반드시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을 듣고 누가 보냈나 보라고 했습니다. 유지 사도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보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이야기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전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 맞아.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그러세요.” “그런데 자기 이야기만 하고 돌아다니면 그건 보낸 자가 아니다.” 합니다. 보냈어도 가다가 그는 마음이 변해서 다시 중심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낸 자이기 때문에 늘 편지도 하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네 설교를 내가 듣고 있다. 들어 보고 있다. 조은소리에도 네가 글을 썼는데 네가 조은소리에 글 쓴 것 잘 썼더라. 내가 다 봤다.” 하니까 “바쁜데 그것도 봤냐”고 했습니다. “다 보지. 계속 쓰도록 하라.” 그랬습니다. “글을 열심히 쓰고 나에게 배운 대로 글도 잘 쓰고 열심히 하도록 하라. 아주 뼈다귀 있게 잘 썼다.” 했습니다. 이와 같이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다른 종교들을 보십시오. 종교들이 많지 않습니까. 영생교도 보고, 통일교도 보고, 증산교도 보고, 불교도 보고, 유교도 보고, 그리고 대순진리교도 가서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보십시오. 예수님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보낸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낸 자가 아니면 하고 싶어도 안 해지는 것입니다. 들은 것을 이야기하게 되지 않습니까. 보낸 자는 그것만 봤기 때문에 그 이야기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사람들을 못 만나게 하고서 산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이야기했으니 그 이야기만 할 줄 압니다. “나머지는 성경 말씀이 여기에 있으니까 여기 말씀을 가지고 늘 하라.” 했습니다. “어떻게 설교를 하는가 하면, 본문 말씀을 가지고 하려면 본문 말씀을 일사천리로 해주고 시대를 대언하는 거다. 그것이 기본이여, 기본. 그 위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대로 말씀을 그때그때 생중계를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했지.” 이에 설교 들을 때도 쉽고 뜻 있게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각자 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관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고 어떤 종교로 갈지 몰라 왔다갔다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와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섭리사가 세계적으로 제일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제일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이 뭐니 뭐니 해도 다 거기에 가지를 말고 속지를 마십시오. 물질 가지고 허세부리는 데는 가지를 마십시오. 하나님은 물질의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질 가지고 자랑하고 물질 가지고 뭐 했습니까. 누구는 뭐 없습니까. 우리 섭리사 사람들이 1인당 다만 돈 10만원씩만 헌금하면 일순간에 수백억이 모이는데 그것이 뭐가 겁납니까.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항상 신앙입니다. 제자들이 나에게 가르쳤습니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압니까. “선생님, 우리들에게 늘 교훈하면서 ‘일편단심 따라오라. 지금은 힘들지만 끝까지 따라오라. 원망하면서도 따라오고 나한테 욕을 하면서도 따라오라.’ 그렇게 가르쳤지요. 선생님, 선생님께 우리가 꼭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뭐냐.” “선생님, 절대 우리가 헐벗고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돈에 대해서 사업 같은 것 하지 말아 주세요.” 나에게 그것을 가르쳤습니다. “역시 너를 통해서 또 한 번 나를 가르치는구나.” 예수님께서 나를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물질로 나가지 마라. 너는 생명만 계속 하도록 하라.” 그러니 전도해다 놓으면 먹을 것이 없어서 라면 하나 삶아 놓고 네 명씩 먹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이, 우리 어떤 종교처럼 볼펜 팔고 다니고 어떤 종교들처럼 장사하자.” 안 했습니다. 안 해서 우리는 그것을 못 합니다. 계속 신앙 자본만 불리고, 신앙 길만 온 것입니다. 계속 신앙 길만 오니까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지금 배고파 죽습니까. IMF가 있어도 우리 섭리사에는 빚이 없습니다. 그렇게 50개국 나라에 번져가도 빚이 없습니다. 빚 없으면 됐지 않습니까. IMF 때 다 빚졌지 않습니까. 그 큰 회사들도 빚지고 전부 국가 돈 갖다 쓰고 남의 돈 갖다 쓰고 했지만, 우리는 남의 돈 갖다 쓴 일이 없습니다. 쌓아 놓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도 없고, 그날그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먹고 복음을 펴고 잘 삽니다. 그러면 됐지 않습니까. 신앙 자본을 줬습니다. 신앙만 계속 넣어줘서 근본을 해줬기 때문에 굶어 죽지 않게 해놓았습니다. “그 길을 가라.” 하시며 제자들을 통해서 또 한 번 예수님이 가르쳐준 말씀을 나에게 교훈한 말씀으로 깨닫고 그렇게 갑니다. 어디에 돌아다녀 보면 진짜 1억을 투자하면 30억이 나에게 들어올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안 합니다. 제자들 말을 지키고 예수님 말씀을 지키느라고 안 합니다. “하려면 제자들, 너희들이 하라. 너희들이 하라.” “선생님이 해야 머리가 돌아가서 하잖아요.” “나는 사업할 시간이 없어. 설교시간만 계속 해야 돼. 설교만 하고 너희들의 보고 받고 하는 그 정치 외에는 못 해. 그것만 해. 강대상 위에서만 살다 가야 된다.” “다른 종교들은 사업을 해서 엄청 돈도 벌고 굉장한데요.” “그거 있잖아. 죽으면 다 놓고 가야 돼. 너희들은 자본이 뭔가 하면, 죽어도 갖고 갈 수 있는 그 자본을 내가 말해주고 살게 했잖아. 바로 그것이 신앙의 자본이여.” 신앙의 자본이 있으면 물질 자본도 신앙의 자본만큼은 꼭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신앙 자본이 있을 때 물질 자본이 따랐지요. 요셉이 신앙 자본이 있으니 물질 자본과 명예 자본이 따라다녔지요. 다 그랬습니다. 예수님도 신앙 자본을 통해서 물질 자본이 따라서 전부 만물이 다 따라서 움직였지 않습니까. “신앙의 문제를 하라.” 제자들에게서 편지가 올 때 “어떻게 하면 돈도 많이 벌어서 십일조도 하고 선생님을 돕고 섭리를 돕고 가겠습니까. 돈을 벌려고 해도 안 됩니다.” 해서 “그거. 신앙생활만 잘 하면 그게 돈 버는 일이여. 최고 돈 버는 일이여. 그건 부도도 안 나.” 그랬습니다. “정말로요. 언제까지 그렇게 합니까.” “계속 죽을 때까지 해야 돼. 죽을 때까지 계속 받을 테니까.” 그랬더니, “그래요. 그럼 지금 내가 없는데 바로 시작하면 될까요.” “즉시 돼. 즉시. 즉시 도움이 된다.” “네. 감사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즉시 되도록 해주마.” 그래서 즉시 되었습니다. 즉시 도우니까 즉시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 자본이 물질 자본이니 그렇게 하면서 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말씀들은 수요일 말씀을 통해서 또 말씀이 나갈 것입니다. “포도송이가 익었다. 낫을 휘둘러 곡식을 거둬들여라.” 나는 지금 낫을 휘두르다가 얼마나 낫을 휘두르고, 익은 곡식 거둬들이느라 정신없이 해 대꼈는지 팔뚝이 지금 안 올라갑니다. 올라가지가 않습니다. 왼손잡이가 아니니까 왼손은 올라가는데 오른손은 얼마나 낫을 휘둘렀는지 올라가지가 않습니다. 이 겨드랑이 밑에 몽우리가 계란만합니다. 겁이 나서 며칠 전부터 계속 기도했습니다. ‘이게 혹시 무슨 암인가.’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이 그런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 내가 시골에서 일할 때 가을철 추수 때 낫질을 해대면 몽우리가 이만하게 생겼습니다. ‘아니, 선생님이 요새 진짜 낫을 휘두르는 거야.’ 생각할 것입니다. 말씀의 낫을 휘두르는데도 낫을 휘두르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무슨 낫이요.’ 붓이 낫이 아닙니까. 붓을 휘두르고 말씀을 통해서 휘두르고 하니까 그 정도로 겨드랑이에 이만한 알통이 배였습니다. 아파 죽겠습니다. 이것 때문에 요새 끙끙 앓습니다. ‘내가 제대로 휘두르고 있구나.’ 했습니다. 나중에 알 것입니다. 나머지는 영감으로 깨닫고 알고 있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게 되면 나는 무섭게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하는 말이 “쟤는 한번 하면 죽는지 사는지도 몰라. 쟤는 일하다 죽을 거야. 그러지 말고 조금 초근초근 하라.” 그럽니다. 나는 뭘 하면 먹는 것도 화장실도 없이 뭘 한번 하면 거기에 미쳐서 정신을 못 차리고 해버립니다. 그야말로 눈이 벌개져서 완전히 거기 미쳐서 해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좋아합니다. 열불나게 한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뭐가 안 되는 것도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추수 때에는 거둬들여라. 물질로 거둬들이고 모든 것을 다 거둬들여라. 생명도 거둬들이고, 너희들이 이 때를 위해서 그동안 수고하고 애쓰고 몸부림 쳤으니까 거둬들여라.” “네! 알겠습니다!” 하고 눈을 확 뜨기 바랍니다. 눈을 확 떠서 거둬들일 것이 너무 많으니까 거둬들이라는 것입니다. 거둬들일 때 보면 자기 밭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산에 가면 으름들이 막 익어서 벌려 있고, 머루가 익어서 시커멓고, 포도가 익어서 시커멓고 별것들이 다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둬들일 것이 많습니다. 이지가지 거둬들일 것이 너무 많으니까 부지런히 거둬들여야 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8장에 “천사가 거듭 다시 말하기를 거둬들여라. 포도송이 익었다. 거둬들여라” 했습니다. 거둬들이는 것이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농부가 땀 흘려서 열심히 눈물겹게 농사지은 것을 거둬들일 때 얼마나 보람 있는지 압니까. 그때는 고통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라지 뽑으면서 잡초 뽑으면서 눈물겹게 하다가 정말 성질나서 밭 매면서 집어 던지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횟골에 가서 밭맬 때 보면 밥을 먹으러 안 왔습니다. 꼭 온다고 해서 국수를 삶았는데 불어 터졌습니다. 그때도 어머니를 부르면 대답도 안 하고, 밥 갖고 오라는 소리도 안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내가 국수를 삶아서 갖다 주면 밭고랑에서 먹었습니다. ‘그렇게도 밭 매는 것이 좋은가.’ 했습니다. “이렇게 미친 척 안 하고서 어떻게 일을 해먹고 살아. 집에 가면 벌써 갈 때 시간, 올 때 시간, 먹을 때 시간, 그러다 밥 먹고 졸려서 나가떨어지면 해 넘어가는데 언제 오냐. 그러니까 안 가는 거야. 참고 와서 저녁때 밥 먹는 거야.”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밭고랑에 밥 갖다 주고, 국수 삶아다 주고 오고 했더니 먹으면서 풀 뽑고 그랬습니다. “일은 저렇게 하는 거다.” 했습니다. 모세는 양 떼를 갖고 가르쳤지만 선생님은 농사지으면서 생명을 다루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지금도 그것을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하는 말이 “어머니가 하듯이 나도 지금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자, 거둬들이기를 바랍니다. 이지가지 거둬들일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때가 가장 찬스이고, 너무 좋은 때입니다. “거둬들여라.” 할 때가 자기에게 소원성취 하는 때입니다. 벌써 편지들이 왔습니다. “선생님이 거둬들이라고 해서 소원 성취를 했습니다.” “뭘 성취했어.” “잘 됐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전에는 부모가 이단시 하고 왜 이단 따라다니냐고 하니까 싸우지도 못하고 한이 되고, 부모 떨어져서 산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그래도 나오지 말고 부모를 봉양하라고 해서 안 나왔더니만, 부모님이 한번은 부르더니 “이리 오라. 너도 딸자식이지만 내가 너에게 재산을 주고 싶어.”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오빠들은 열 개를 준다면 너는 세 개를 줘야지.” 그러더랍니다. 거둬들이라는 말을 선포하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일말씀을 선포할 때 그렇게 큰 것입니다. 주일말씀에 여러분을 혼내는 말씀이 오면 내가 탁 돌립니다. 설교를 늦게까지 안 하면서 돌리는 것입니다. 축소판이 되어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 한참 전도하고 뭐하라고 했는데도 그 일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내가 압니다. 그들로 인해서 심판의 말씀이 나가려고 했었습니다. 이번 말씀을 딱 돌렸습니다. 돌려서 이 말씀을 해갖고 오는데 4시간 동안 준비했습니다. 사랑하니까 예수님이 내 말을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거둬들여라! 또 된다!” 했습니다. 심판 말씀이 나가면 금주부터는 한 주일 동안 심판 받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심판 받는 그 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거둬들이라고 했으니까 또 거둬들이면 또 나옵니다. 계속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계속 거둬들였습니다. 그래서 또 거둬들이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혼골수를 쪼개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는데, 여러분들이 반드시 같이 거둬들일 때 같이 모두 거둬들여야 됩니다. 왜 한쪽은 놀고 있냐는 것입니다. 모두 같이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말씀이 다른 데로 돌아가는 말씀을 다시 잡은 것입니다. 잡아서 오늘 말씀을 빌립의 말씀으로 돌리면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또 있습니다. “너희들이 전도를 많이 하고 무엇을 많이 거둬들이려면 나와 하나 되어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와 하나 되어라. 그러면 많이 거둬들일 수가 있다. 꼭 반드시 하나 되어라. 그러면 물질도 거둬들이고 생명도 많이 거둬들이고 그리고 너희들이 원했던 꿈들이 다 이뤄지리라.” 요한복음 15장 5절의 말씀을 신령한 말씀으로 뒤집어 말씀하면 그렇게 말씀이 나옵니다. 또 하나는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이 말씀도 나오는데, 자꾸 찾고 돌아 다녀야 거둬들일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해보니까 그렇습니다. 해보니까 자꾸 찾고 돌아 다녀야 뭔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애인으로 완전히 같이 끼고 사는 이성의 애인이요, 신앙의 애인이요, 애인입니다. 못 이기고 홀연히 어디를 데리고 갑니다. 손잡고 가는 것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상하니 나가고 싶어서 가보면 예수님이 이끄신 것입니다. 이런 단상을 사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파는 사람이 “북쪽 지방은 이런 것이 귀합니다.” 그랬습니다. 눈 쌓이는 북쪽 지방입니다. 여러분들 거둬들이십시오. 부지런히 거둬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서 거둬들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거둬들여라! 빨리 거둬들여라! 늦으면 안 된다. 반드시 이때를 위해서 너희들이 그동안 고생했으니 거둬들여. 빨리 거둬들여!” 그러면 축도 하고 마치겠습니다. <축도>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와보라” 했습니다. 빌립처럼 그런 복음을 펼 때가 되었으니 그런 복음도 펴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해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감동과 감화와 역사하심과 내가 빈 평안과 은혜가 이들 위에 함께 하며 영원할 지어다. 아멘. 그러면 여기에서 말씀을 모두 마치면서 끝나겠습니다. 바이바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