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2014.08.24 (일)
2014년 8월 24일 주일말씀 생활속의 영웅이 되어라. 생활 속의 휴거다
- 선포일
- 2014.08.24 (일)
- 성경 본문
- 누가복음 16장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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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4일 주일말씀-생활속의 영웅이 되어라. 생활 속의 휴거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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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4일 주일말씀>
생활 속의 영웅이 되어라. 생활 속의 휴거다.
본 문 누가복음 16장 10절
*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강조하면서 한 손, 혹은 양손 기본 제스처 하기.
할렐루야! 삼위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주일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의 평강이 충만하기를 빕니
다.
8월은 섭리사에 ‘집회’도 많고, ‘모임’도 많고, ‘선생이 특히 해야 할 일
들’도 많아서 시간에 쫓깁니다.
그래서 주일말씀을 어떻게 보낼지 성자께 기도하고 의논하니, 성자는 오늘 말씀
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생활 속의 영웅이 되어라. 생활 속 휴거다.’입니다.
그리고 성자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계시자들을 통해 말씀한 것들은 꼭 지켜야
할 급한 말씀이니, 그 말씀도 전해 주어라.” 하셨습니다.
이때 선생에게 결재받기 위해 보내온 계시 몇 가지를 읽어 봤습니다. 그중에 생
활 속의 영웅이 되라는 계시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시 말씀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낙타바위>의 사연에 대
한 계시입니다. 이 말씀은 <낙타바위>에 걸어 놓겠습니다.
나머지 꼭 알아야 할 계시 말씀은 CTN에 올려놓고 문서로도 보내 줄 테니, 모
두 보고 읽기 바랍니다.
‘생활 속의 영웅이 되어라. 생활 속의 휴거다.’라는 주제로 오늘 말씀 시작하
겠습니다.
먼저 선생이 <성자의 말씀>을 전해 주고, 이어서 <이에 해당되는 계시 말씀>을
전해 주겠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의 뜨거운 감동 감화 역사하심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시작>
여러분은 <시대 말씀>을 듣고 섭리사에 왔습니다. 맞지요?
그 말씀은 성자께서 이 시대에 전하시는 말씀으로 선생이 가장 먼저 배우고 행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그 <말씀>을 듣고 섭리사에 와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선생이 생활 속에 어떻게 행하는지 못 보니, ‘선생의 생
활과 행함’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자는 나와 늘 같이 살면서 ‘선생의 생활과 행함’을 다 보시니, 선생
에 대해서 최고로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자는 합당한 사람들에게 ‘선생의 생활과 행함’을 계시하며 말씀해 주
십니다.
‘사람의 생활과 행실’은 <사람>은 다 볼 수 없으니 속일 수 있지만, <성자>는
모두 다 보시니 속일 수 없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선생은 이곳에서 ‘책’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과 성자의 말씀>입니다.
선생이 바깥에서 뛸 때는 청중들을 만나면서 해야 되기에 책을 쓸 수 없었습니
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을 때가 책을 쓸 기회입니다.
‘기록’으로 남겨 놔야 남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으며, ‘기록’으로
남겨 놔야 성약역사가 1000년 동안 펼쳐져 가면서, 후대까지 모두 보고 제대로 알
고 따르게 됩니다.
제자들도 기록하지만, 선생이 사명자로서 <하나님과 성자께 받은 말씀>을 그대
로 기록해 놔야 가장 완전합니다.
선생이 책을 쓸 때는 멋있게 쓰는 데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생명력 있게 쓰는 데 목적을 둡니다.
책을 생명력 있게 쓰려면 ‘한 단어, 한 구절’을 제대로 나타내면서 써야 됩니
다. 그래야 ‘글 전체, 책 전체’가 <생명력 있는 위대한 글>이 됩니다.
이와 같이 선생은 ‘사명’만 내걸지 않고, ‘사명의 뿌리 하나하나’를 생활 속
에서 ‘한 단어, 한 구절’같이 세세히 실천합니다.
생활 속에서, 삶 가운데서 해야 될 ‘작은 일들’을 제대로 못 하면, ‘큰일들’
도 다 실패합니다.
축소한 ‘작은 일’을 충성으로 행하지 않으면, 거기서부터 ‘큰일’도 깨지게
됩니다.
<잠시 쉬었다가>
‘큰일’을 할 때는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활’을
보면 나태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지도자 사명을 가지고 있어도 ‘신앙’에 힘이 없고
금방 쓰러집니다.
‘생활 속’에서 소홀히 한 사람들은 큰 사명자들이나 목사들도 모두 넘어지고,
신앙을 저버리고 섭리사를 나갔습니다.
청중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는 정말 열심히 잘합니다.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을 때, 한두 명과 같이 있을 때,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생
활할 때는 말도 함부로 하고, 별 정성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활이 연
속되면, 결국 쓰러지고 맙니다.
신앙을 저버리고, 쓰러지고 넘어져서 섭리사를 나가는 사람들을 보세요. 온갖 핑
계를 대면서 “지쳤다. 힘들다.”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모두 사람들 앞에서는 잘하
는 듯 보여도 ‘생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 <글씨 한 자>를 쓰더라도 잘 쓰려면 ‘한 점, 한 획’까지 잘 써야 됩니다.
- <글>을 쓸 때도 ‘한 단어, 한 문장’ 모두 잘 써야 ‘문맥 전체’를 잘 쓰게
됩니다.
- <말>을 할 때도 ‘한 단어, 한 구절’까지 잘해야 ‘그 이야기 전체’를 잘한
것입니다.
생활 속의 의로운 작은 행위 하나하나는 ‘글 한 자’와 같고, ‘한 단어’와 같
고, ‘한 문장’과 같습니다.
고로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자기 인생>을 생각해서 <자기>가 ‘생활 속’에서
잘해야 됩니다.
선생이 산속에서 20년 동안 기도생활을 할 때, 사람들은 나를 못 봤습니다. 그
렇다고 내 마음대로 했으면, ‘그 마음과 생각과 행실’을 그대로 가지고 나왔기에
‘성자의 몸’이 되어 일할 수 없었고, 성자도 내게 일을 맡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는 다 보십니다. ‘모든 말과
생각과 행실’을 다 보십니다. 그리고 거짓 없이 행한 대로 ‘사명’을 맡기십니다.
선생은 누가 보나 안 보나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 앞에 완전히 행하듯 했습니
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자는 다 보셨으니, 다 아십니다.
<잠시 쉬었다가>
하루는 성자께 “이곳이 좁지만, 앉으세요.” 했더니, 성자는 앉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쁘신가? 급히 가 보실 데가 있으신가?’ 생각했습니다.
그때! ‘방금 방을 닦았어도 <만왕의 왕 성자>가 오셨으니, 성자가 앉을 곳만이
라도 한 번 더 닦는 것이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여 <성자>를 대하는
것이다.’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자가 앉을 곳을 다시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랬더니 성자는 그곳에 앉으
셨습니다.
<전능자>를 제대로 믿고 모시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전능자>는 <사
람> 대하듯 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도 성령님도 성자도 ‘거울’과 같습니다.
자기가 찡그리면,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이 찡그리고 있지요?
자기가 웃으면, 거울 속의 자기 모습도 웃고 있지요?
하나님도 성령님도 성자도 우리가 대하는 대로 대해 주십니다.
우리가 대하는 대로 역사하십니다.
<잠시 쉬었다가>
<휴거>도 ‘생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휴거되어 <황금성>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만 변화
되는 것이 아니고, 집회 때만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말씀을 행하고, ‘생활 속’에서 온전히 행하고, ‘생활 속’에
서 점점 변화되고 성장하면서 <신부의 형체>를 갖추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휴거>가 좌우됩니다.
집, 학교, 직장, 공적 근무지, 개인 사명지 등 ‘24시간 자기의 생활’이 중요합
니다. ‘생활 점수’를 잘 받아야 됩니다. ‘자기 생활’로 인해 <자기 운명>도 좌우
되고, <휴거>도 좌우됩니다.
죄를 짓고 살다가 교회에 와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가서 ‘생활
속’에서 죄를 안 짓고 온전하게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만 성자를 찾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가서
‘생활 속’에서 성자를 찾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변화를 이루며 휴거되는 것입니다.
대개 “휴거에 자신이 없다. 더는 지쳐서 못 하겠다. 힘들다.” 하는 사람들은
‘생활’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활’은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남>이 해 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
기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생활’을 잡지 못하고,
‘생활 속’에서 <자기 할 일>을 못 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탄, 마귀, 인사탄, 악평자 모두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생활 속’에
서 유혹과 꾐과 악평을 이기지 못하면, 쓰러집니다. 고로 ‘생활 속의 영웅’이 되어
서 물리쳐야 됩니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도 ‘생활 속’에서 찾으면서 같이 살고, 말씀도 ‘생활
속’에서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어떤 한 사람이 학교에서 누구를 전도하려고 ‘만날 장소’를 정해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답니다.
가는 길에 ‘쥐’가 죽어서 썩어 있는 것을 봤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전
도하려는 사람’과 연결되어 생각이 들었답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보니, 두 사람이 서 있었답니다.
그때 오는 길에 봤던 ‘죽어서 썩은 쥐’가 연결되어 깨달아지면서 ‘저들은 죽
은 쥐 같은 영들이다. 이단의 교리로 거리를 누비며 사망으로 데려가는 족속이다.’
깨닫고, 한마디도 안 하고 “안녕히 가세요.” 하고 돌아왔답니다.
캠퍼스나 거리에 나가면 <속>은 ‘이리, 늑대, 뱀’인데, <겉>은 ‘양의 옷’을
입고 전도하면서 꾑니다.
이단이 <섭리 말씀>을 가지고 가서 생명들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받은 말씀인 양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자가 모두 보고 계시니,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아무리 <섭리 말씀>을 가지고 가서 전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
다.
<말씀>이 있고, <사명자>가 있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가 맞아야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누가 악평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이 되겠습니까?
누가 아니라서 해서 <하나님이 보낸 자>가 아닌 것이 되겠습니까?
때가 갈수록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가 드러내시고,
때가 될수록 모든 것이 드러나니 숨길 수가 없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모두 ‘평소’에 잘해야 됩니다. ‘생활 속’에서 잘해야 됩니다.
지도자들, 사명자들, 목사들이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는 잘합니다.
그러나 ‘개인’으로 돌아가서 ‘생활 속’에서 보면 <말>도 막 하고 <생활>도
엉망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그 사람의 말과 생각과 행실’이 어떠한지 보면, 그 사람이
다 보입니다. <휴거 선>이 어느 정도인지 다 보입니다.
‘영의 눈’이 어둡고 ‘감각’이 없으니 성자도 분체도 옆에 있다는 것을 모르
고, ‘생활 속’에서는 자기중심으로 말하고, 자기 성격을 다 섞어서 함부로 말하고,
행실도 막 합니다.
‘생활 속’에서는 본색이 다 드러납니다.
어떤 지도자들은 선생에게 배웠다고 하고 자기는 잘 안다고 하면서 생명들에게
막말을 하고, 혼도 잘 내고, 생명들을 자기 잣대로 보면서 함부로 대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바로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선생님이 편지로 힘을 주셨는데, 지도자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꺾이고 힘이 없어서
<휴거>에도 자신이 없어요.” 합니다.
그러면 선생은 “선생이 마음 안 꺾었으면 됐어. 다른 사람들은 ‘자기 성격’으
로 상대를 잘 꺾는다. 성자의 능력과 지혜가 부족해서 ‘강한 말’로 꺾는 것이야.
너, ‘지도자들의 말’에 마음 꺾이면 ‘사탄 말’에는 영까지 꺾이겠다. 힘내라!”
하고 편지해 줍니다.
단상 앞에서나 대중 앞에서는 ‘천사’ 같고, 생활 속에서는 ‘자기 성격’대로
강하게 행하며, 약한 개인들에게는 ‘이리’나 ‘하이에나’가 이빨로 물듯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때는 성자가 혼내십니다.
<말>은 ‘검’이며 ‘예리한 바늘’ 같아서 어린아이나 성장하고 있는 자들에는
큰 상처가 됩니다.
말할 때는 항상 ‘평안을 주는 말’을 해야 됩니다.
‘평소에 지혜롭게 말하기’입니다.
‘평소에 생활을 잘하기’입니다.
<전환>
이제 <성자께서 주신 계시 말씀>을 전해 주고 마치겠습니다.
이 계시는 ‘안산의 박여미마’가 깊이 기도하면서, 성자께 <깊은 계시>를 받고
싶다고 했을 때 주신 계시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러분이 선생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섭리사에 와서 살지만,
‘선생의 생활과 행실’은 못 봅니다. 그러나 성자는 모든 것을 보십니다.
성자는 큰 사명자에게만 나타내지 않으시고, 여건이 되면 깊이 기도하고 행하는
자에게 그때 그 상황에 맞는 계시를 주며 말씀하십니다. 성자가 행하시니 온전합니
다.
지금부터 성자의 말씀 듣겠습니다.
<성자의 말씀>
‘생활 속의 휴거’다.
‘선생’을 크게 깨달으려 하기 전에 ‘생활 속의 선생’을 깨달아라.
‘선생의 큰 것’을 닮으려 하기 전에 ‘생활 속의 선생’을 닮아라.
이는 섭리사 모두에게 전하는 말이다.
섭리사에 휴거되는 자들을 보아라.
‘생활 속 사랑, 생활 속 변화, 생활 속 휴거’를 이루고 있다.
<휴거>를 크게만 생각하지 말아라.
‘생활 속의 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생활 속의 너의 행실 하나하나’로 <휴거>가 좌우된다.
선생도 사명적으로 크게 깨달으려고만 하지 말고,
‘생활 속 선생의 행함’을 깨달아라.
그럼 ‘사명’도 쉽게 깨달아진다.
너희가 착각하는 것이 있으니,
무엇이든지 ‘크게’만 보고 ‘작게’는 못 보는 것이다.
이는 <섭리역사>는 보고, <선생>은 못 보는 것과 같다.
<축소 – 확대>로 봐야 정확하다.
<큰 말씀>은 들었는데, 왜 변화되지 못하는 줄 아느냐.
‘생활 속’에서 변화되지 않으니, 그대로인 것이다.
<잠시 쉬었다가>
<깊은 계시>를 받고 싶다고 했지?
‘선생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 <깊은 계시>가 아니다.
‘섭리사에 꼭 필요한 말씀’이 <깊은 계시>다.
오늘 나 성자가 ‘생활 속의 휴거’에 대해 말할 테니,
깊이 듣고 깨닫고 행하여라.
‘섭리사 공적인 시간’에만 휴거된다면, 휴거되기 얼마나 힘들겠느냐.
시간이 부족해서 <휴거>를 이룰 자 몇 없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너희 생활 속’에서도 <휴거>를 이루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하냐.
이것을 모르니 ‘생활 속 휴거’를 이루는 자들이 몇 없다.
‘생활 속 시간’까지 활용해야지
‘공적인 시간’에만 <휴거>를 이루려고 하니, 변화가 더딘 것이다.
‘생활 속’에서 안 하면서
“휴거가 힘들다. 아무리 해도 변화가 안 된다.” 한다.
먼저 ‘생활 속의 너의 말 한 마디, 너희 행동 하나하나’부터 고쳐라.
선생이 <사생애 기간>에 ‘큰 사명’을 가지고 행했느냐.
누가 안 봐도 크게 생각하고 행하니 ‘큰 사명을 가진 자’가 되었다.
선생의 생활 속속들이, 뼛속들이 시대 사명을 할 자로 만들었다.
또 선생이 지금 그곳에 있으면서,
처음부터 그 많은 일들을 할 힘을 가지고 있었겠느냐.
생활 속에서 만들어서 하니, 모든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섭리역사>도 마찬가지다.
너의 눈에 크게 ‘기적 같은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기 전에
네가 ‘생활 속에서 변화되는 기적’을 보여라.
‘네가 변화되는 것’이 <기적>이다.
‘큰 것’만 바라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시작해라.
‘네 말투 하나, 네 습관 하나, 네 행실 하나’도 못 고치는데
어떻게 ‘영원한 변화’를 이루겠느냐.
이 말씀은 어느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섭리사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이다.
너희 모두 ‘개인 영웅’이 되라고 했다.
‘생활 속 영웅’이 되어라.
<행할 것>을 행하고, <만들 것>을 만들고, <끊을 것>을 끊으며
‘개인 영웅’이 되어라.
<잠시 쉬었다가>
‘생활 속의 점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자리’에서는 잘한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는 그것을 유지하지 못한다.
‘생활이 된 사람’이 진짜 변화된 사람이다.
보이나, 보이지 않으나 잘하는 ‘생활 속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
‘보이는 곳에서만 잘하는 사람’의 영을 보면,
머리는 큰데 몸은 비쩍 말라서
그 큰 머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목이 꺾여 버린다.
‘생활 속에서 잘하는 사람’의 영을 보면,
머리도 몸도 조화롭고 건강하여 아름답고 신비하고 웅장하다.
‘그 행실과 삶’이 삼위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졌으니,
‘그 영’도 아름답게 만들어진 것이다.
‘선생의 사명’을 보기 전에 ‘선생의 생활과 행함’을 먼저 보아라.
말씀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간다.
너희도 ‘생각’만 잘하지 말고, 또 ‘어느 한때’만 잘하지 말고,
‘삶과 생활’이 변화돼야 한다.
<잠시 쉬었다가>
생활 속에 ‘나 성자’가 없는 자들도 많다.
‘생활 속’에서는 자기 혼자 살다가
‘예배’때나 ‘모임’ 때만 나를 찾는다.
‘평소’에 신랑을 찾지 않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과 같다.
그러니 신랑이 계속 그 곁에 있겠느냐.
신랑이 신부를 계속 사랑해 주며 함께해 줘도
‘신부의 생활과 삶’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신랑이 떠나게 된다.
너희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나 성자를 부르고 찾고 사랑하며 살고 있느냐.
남자와 여자를 보아라.
한 번에 ‘신랑, 신부’라 부르며 같이 사느냐.
서로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같이 밥도 먹고, 계속해서 같이 지내다가
사랑 체질이 맞으니 결혼하는 것이다.
<휴거>도 마찬가지다.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나 성자를 부르고 찾고 사랑하며
나 성자와 함께 이것저것을 행하면서 살다가
사랑 체질이 맞아서 휴거되는 것이다.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인데, 내가 왜 굳이 또 이야기하겠느냐.
듣기는 들었어도, 알기는 알아도 <행실과 생활>이 변화되지 않으니,
다시 거듭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행하자!
<때>는 ‘한때’다.
<때>가 지나면, 더 하고 싶어도 못 한다.
다음에 한다고 하지만, 다음에 하겠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하루에 버스가 ‘딱 한 대’만 오는데,
그 버스를 안 타고 다음 버스를 탄다고 하는 자와 같다.
<잠시 쉬었다가>
‘생활 속의 변화’가 힘들거든, 선생을 생각해라.
‘생활 속의 변화’는 안 되는 일이 아니다. 되는 일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자. 나 성자가 늘 함께한다.
섭리인들이 ‘개인 생활 점수’가 낮다.
‘개인 생활 점수’는 <휴거>를 좌우한다.
<휴거>에 큰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모두 ‘생활 점수’를 올리자.
나 성자가 너희를 사랑하여 이 말을 전했다.
정말 사랑해서 전한 말이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너’에게 말한다.
예사로 듣지 말고 꼭 행하자.
사랑한다. 성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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