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말씀2015.05.18 (월)
월 새벽말씀 1f27ef41
- 선포일
- 2015.05.18 (월)
- 성경 본문
- 요한복음 1장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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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8일 새벽말씀(편집본)
금주 말씀은 복음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복음!
복음과 전도는 다르다. 전도는 개인에게 가서 하는 것이고, 복음은 범위가 넓습니다.
꽃나무의 가치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꽃을 이렇게 만들었다.” 하면 그게 복음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설명할 때도 하나님을 붙이면 복음입니다.
또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그 시대의 하늘로부터 떨어진 말씀, 메시아가 선포한 말씀
이 복음입니다.
그런 범위로 어제까지 말씀했습니다.
복음을 끊어버리면, 어느 때 끊는가 하면, 복음이 끊어질 때가 어느 때 끊어지는고 하
니, 에덴동산에서 복음을 끊었을 때가 있습니다. 왜 끊었는고 하니, 범죄함으로 복음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끊었다가 1600년 만에 노아에게 다시 복음을 말했습니다.
“노아야, 방주를 만들어라” 이러면서 시작됐습니다. 보던줄로 방주 만들라는 소리를
안 했습니다. 섭리하다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이 왜 끊어는고 하니,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법칙을 벗어나 인연을 끊을
때 복음이 끊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에 대한 것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전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화됐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말씀을 예수님
이 실체로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화 됐다는 것은 말씀이 아주 체질에 배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통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는 말씀이 생활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화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예수님께는 생활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생활
이 되어서 예수님이 움직이는 상태가 바로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동한 모든
일이 말씀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상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실
존체가 되고,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송국에서 하고 싶은 얘기가 TV를 통해서, 라디오를 통해서 전달되듯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이 육신화 됐다고 합니다.
그 육을 통해서 반영을 보인 것입니다. 육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모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나타나신다!
“자연을 통해서 말씀이 육신화됐다, 말씀이 만물화됐다! 만물을 통해서 나타나 만물화
됐다! 육신을 통해서 육신화됐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 말씀이 만물이 됐다! 만물을 통해서
말씀이 전달되고 있다!” 이런 식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예수님처럼, 또 선생님처럼 말씀이 육신화되어서 말씀을
이루어야 됩니다. 말씀이 체질화되어야 됩니다. 말씀이 생활화되어야 됩니다.
생활종교는 살아남아지지만,
관념적인 종교는, 관념 신앙은, 생각만 하고 안 하는 신앙은 관념 신앙입니다. 관념적
신앙은 사라집니다. 이익이 없습니다. 유익이 없습니다. 결국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생활화되는 단계를 우리가 알았으니까 말씀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4대교리를 배워서 우리는 역사가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배웠는데도 하늘을 쳐다보고서
있으면 말씀이 육신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믿고 땅에다 나무를 심고, 돌을 갖다놓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기가
신부가 되어서 신랑같이 사는 것입니다
애정과 사랑과 높임과 존경함과 위해줌과 섬김의 도리를 하면서, 늘 수발들면서 사는
것입니다. 기쁨과 희락과 낙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돼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화되었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를 않습니다. 왜? 그 맛을 못 느껴서 그렇습니다.
먹어봐야 음식의 맛을 느끼고, 살아봐야 사는 맛을 느끼는 것이지 살아보지도 않고 어
떻게 사는 맛을 느끼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이 사는 맛을 느끼겠습니까? 안 살아보고?
20대까지 살아봐야 20대의 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살아
봐야 그 때의 맛을 느낍니다. 안 살아본 사람들은 맛을 못 느낍니다.
돌을 주먹으로 때려보고 머리로 받아봐야 돌이 얼마나 딱딱한가 맛을 느낍니다.
그와 같이 말씀가지고 살아봐야 말씀의 맛을 느끼고, 하나님을 섬기고 위하고 받들고,
그리고 하나님을 주체화합니다. 공산주의 주체사상처럼 우리는 하나님 주체사상을 갖고 있
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주체사상, 성령의 감동감화의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상으로
우리가 일체가 되어야 됩니다.
말씀의 육신화! 꼭 그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말씀이 생활화 되지 않으면 그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유익이 없
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지를 않습니다. 어떤 분이라고
그럽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자이십니다. 우리가 안 보이는 것까지 보
고 사십니다. 우리는 육신세계의 눈을 떴어도 안 보이는 것이 많잖아요. 안 보이는 것이 얼
마나 많습니까.
우리에게 안 보이는 것까지 보시면서 하나님은 섭리를 하시니까 우리가 감히 이해를
못합니다.
“왜 저리 가시는가? 하나님이 왜 저렇게 하시는가?”
이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안 보이는 것을 하나님은 일하시니까. 망원
경, 현미경을 보며 감각을 느끼고 눈을 깜빡거리고 쳐다보는 사람을 보면 “왜 저러냐?” 할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눈이 나쁜 사람들은 멀리에 있는 것을 잘 못 봅니다. 눈이 좋은 사람은
멀리 쳐다보면서 희열을 느끼고, 뭘 쓰고 하는데 눈이 나쁜 사람은 “왜 저러냐?” 할 것 아
닙니까. 자기는 안 보이니까.
안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는 사람이 더 많이 일을 할 것이 아닙니까.
시대의 눈을 뜨고, 사건의 눈을 뜨고, 섭리의 눈을 뜨고, 모든 눈을 뜬 사람이 일을 더
많이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깨닫고.
육신의 눈같이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떠라. 시대의 눈을 떠라. 지식의 눈을 떠라.
또 학문의 눈을 떠라. 철학의 눈도 뜨고, 또 나아가서는 은혜의 눈도 뜨고, 말씀의 눈
도 떠라. 모두 뜨라는 것입니다.
뜬 사람이 더 많이 보게 되고, 더 희열을 느끼게 되고, 눈을 뜬 사람이 더 많이 느낀
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도 일단은 보는 사람이 더 많이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
람이 더 많이 일을 하게 되고, 그리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일을 많이 하더라는 것입
니다.
눈뜬 놈이 많이 보게 되듯이 일을 하는 놈이 더 일을 많이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 더 많이 알게 되고.
이런 얘기들이 다 복음에 속한 얘기들입니다. 전도할 때도 써먹지만, 전도할 때는 이
렇게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전도할 때는 개인에게 그때그때 필요한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은 상당히 범위가 넓고 크고, 복음이라는 것은 상당히 엄청나고
웅장합니다. 복음은 웅장한 범위를 차지한다고 할까요. 굉장히 범위가 넓습니다. “복음을 전
하라!” 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개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에게 심리적인 것을 얘기해 주겠습니다.
심리적인 것을 얘기해 주면, 어떤 현상이 있는가 하면 이런 현상이 있습니다.
하나님 얘기를 하고, 예수님 얘기를 하면 약간 부끄럽습니다. 심리적으로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해 봐서 잘 압니다. 전도하러 돌아다닐 때는 약간 부끄럽습니다.
예수님 얘기 안 하고 노래만 하고 돌아다녀도 부끄럽습니다. 꼭 예수 이름만 가져야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름만 대도 부끄럽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지식이 모자란 사람입니다.
노래를 하라고 해도 부끄럽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에 대해 내가 꼬치꼬치 이야기를 해
야 압니까. 부끄럼이 뭔지 모릅니까.
노래할 때 안 부끄럽습니까? 요즘은 노래할 때 안 부끄러워합니다. 노래를 해서 부끄
러움을 못 느끼는 사람도 옷을 벗고 서 있으면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얘기를 안 해도, 예수님 복음을 안 전할지라도 부끄럽다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야 무식한 놈들아. 부끄럼을 타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
목욕탕에 가도 부끄럽고, 어딜 가도 부끄럽고 다 부끄러워합니다. 나이 많이 먹는다고
안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나이를 많이 먹어도 부끄럽다고 구석챙이에 있다가 가는 사람
이 있습니다. 심리적인 것이 큽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안 전해도 부끄러움을 탑니다.
부끄러움을 타는 것은 자기 인간 개발, 인간의 심리적 개발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혹시 홀딱 벗고 돌아다니면서 부끄러움을 타야 되는데, 안 느낀다면 미친놈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데 부끄러워하면 사도바울 선생이 말하기를 똘아이라고 했습니
다. 정신개발을 덜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수영장에서 부끄러워하지 말라 합니다. 딱 들어
붙어서 일어나지도 않으면 부모가 볼 때 “부끄러워 말라.”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왜 부끄
럼 탐을 안 해요? 엄마가 이상해요.” 하면서 둘이 하루 종일 싸웁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수영복입고서 수영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나가서 일하는 것은
의젓한 일입니다. 의젓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다! 의젓한 일이다!
복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요? 정신적 개발이 덜 됐다는 것입
니다.
노래할 때 부끄러움을 탄다면 무슨 개발이 덜 되었지요? 청중 앞에 서는 것에 대해서
개발이 덜되어서 그렇습니다. 청중 앞에 자꾸 서버릇 하면 부끄러움이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부끄러움을 다 타 봐서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 부끄러움이라는 심리적인 것
은 누구든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꼭 이유를 붙입니다. “아, 교회 다니면 핍박이 많다. 교회 다니면 어려움이 있
다.”
교회 안 다녀도 누구든 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자꾸 강조하니까 그렇습
니다. 핍박, 어려움을 강조하니까 그렇지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어려움은 다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데도 어려움이 있고, 장사를 해도 어려움이 있고, 살다보면 어려움이 있습
니다. 생활의 어려움, 고부간의 갈등, 모자간의 갈등, 모녀간의 갈등, 형제간의 갈등, 또 윗
사람과 아랫사람과의 갈등.. 다 갈등이 있습니다. 또 인생 스스로의 자기생활사에 따라서 고
뇌와 고통과 번민이 다 있습니다.
절간의 스님도 다 있습니다. 머리가 길어서 홀락 깎은 스님도 머리 때문에 고민을 합
니다.
이와 같이 다 그런 것이 있으니까 고통이 있으니까 교회 다녀서 있다고 하면 쏘아 붙
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 교회에 다니니까
더 어려움이 없습니다. 괜히 교회 다니니까 핍박이 있다고 하는데, 물론 교회 다니니까 집
에서 교회 다닌다고 핍박을 하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면 어려움은 다 있습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은 핍박이 없습니까?
절에 나간다고 해 보십시오.
“엄마, 나 절에 나가는데 머리 좀 깎으려고 하는데 이해해요.” 하면 “뭐?” 하고서 그
날부터 핍박할 것입니다.
어려움이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나 앞으로 절에 다니면서
평생수절하고 살 거야. 나 스님 될 거야.” 하면 그때부터 핍박하고, 학교도 못 다니고 그럴
것이 아닙니까. 어디서 그런 정신이 들어갔냐고 하면서.
이와 같이 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꼭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만 핍박이 있다고 하면서
하늘에 치명적인 단어를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르칠 때는 누구에게든지 어려움이 있다고 가르쳐야 됩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만 그런 것을 핑계로 대며 교회 안 다닌다고 하는데, 안 다녀
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밥을 먹어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농사지으며 8개월 고생하고 다 지어 추수하여, 떡을
해서 먹어도 계속 깨물면 입이 아픕니다. 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기면서 밀어붙이면서 나아갑니다.
누워서 떡먹기라고 하지만, 누워서 떡을 먹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든가. 그냥 떡을 안
먹고 누워 있으면 편하지요. 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것도 계속 누워 있어 보세요. 얼마나 답
답한가. 아침에 날 샐 때까지, 그 이튿날 까지 계속 드러누워 있어 보세요. 밥만 먹고 누워
있으라고 하면 죽은 인생이지요.
그리고 마라톤 선수가 뛰기만 해 보십시오. 한계 이상을 가면 죽고 싶지요.
그런 것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환난과 어려움을 이기며 나가야 됩니다.
사상을 갖기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을 딱 먹게 가르쳐 놓
은 다음에는, 그 후부터는 지도자가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각오를 가지니까. 그러나 시원찮
게 가르쳐 놓으면 지도자가 맨날 따라 다녀도 부족합니다. 사상이 잘못돼서 그렇습니다.
내가 사람을 볼 때 그럽니다. 사상이 잘 못 되면 안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상이
잘 못 됐다, 정신이 잘 못 됐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상이 잘 못 되면 안 됩니다. 정신이 잘 못 되면, 개념이 잘 못 되
면. 개념을 잘 풀어나가야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 하면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것들이 다 복음에 대
한 얘기들입니다. 하나님이 속한 얘기들이 다 복음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라! 늘 말씀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고 외치라! 가르치라!
복음에 대한 것은 이제 이해가 갔을 것입니다.
전도하면
“아가씨 교회 다녀요?”
“안 다니는데요.”
“왜 안 다녀요?”
“나 바빠서 못 다녀요.”
이렇게 대화하면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 속에도 복음이 들어있지만, 범위는 전
도보다는 복음이 큽니다. 복음의 범위가 웅장하고 많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화 된다 했는데,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생활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아무것
도 아닙니다. 아무 유익이 없고, 아무 건더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실천 안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얘기를 하고 사랑치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고 울리는 꽹과리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실천해야 됩니다.
이론은 은, 실천은 금입니다. 실천해야 됩니다. 월명동도 구상만 해놓고 실천하지 않으
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다음에는 써먹는 것입니다. 누가 많이 써먹느냐가 문제입니다.
계속 써먹으라는 것입니다.
써먹을 때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야 좋습니다.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남의 것
을 써 먹는 것은 다릅니다. 물론 몰래 먹는 것이 더 고소하고 좋다합니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놨을 때, 주인의식을 갖게 됩니다. 여기도 주인의식을 꼭 가져야
합니다. 주었어도 주인의식을 갖지 않으면 병신입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자기가 가꾸고 수고하고 풀이라도 뽑고 나무가 죽으면 쳐주고 주인
의식을 갖고서 늘 살펴야 됩니다. 가끔 한 번씩 온다고 주인의식을 갖지 않고 나그네 의식
을 가지고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돌에다 큰 눈을 그려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쳐다보는 눈을. “하나님의
눈” 이라는 작품을 하려고 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서 움직여야 됩니다.
말씀 다 전했습니다.
오래하면 뭐합니까? 한마디만 해도 실천하려면 힘듭니다. 여러분들도 말씀이 체질화
정도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들, 체질된 것 많잖아요? 밥은 체질화 되었습니다. 밥이 질리지는 않잖아요. 밥
은 쌈박하지는 않지만, 별식이나 떡보다는 쌈박하지 않습니다. 어떤 특수한 냉면보다는 덜
합니다.
그러나 별식은 처음에는 좋지만 계속 먹고 날마다 떡만 먹으면 똑같은 쌀인데 질려버
립니다. 그러나 체질화되면 덜하겠지요.
말씀을 생활화하라! 그렇게 되면 시험발도 안 받습니다. 생활화 안 하면 좀이 쑤시고
무릎이 쑤십니다.
복음을 자기의 생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 먼저 복음에 대한 근본을
깨달아라 했습니다.
자기가 복음을 체질화하고 좋으면 전해야지, 좋지도 않으면서 전하면 되겠습니까.
자기 먼저 그 물건을 사서 써 보고 좋으면 자꾸 권하잖아요.
“아, 그 물건 안 좋다 하더라.” 하면
“내가 써 봤는데 안 그렇더라. 훨씬 좋다.” 그렇게 하듯이 자기가 먼저 복음을 체질화
해서 복음을 온전히, 복음의 가치를 자기가 쓰고 혜택을 보고서 남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됩
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 도>
오늘 복음에 대한 한 주간을 맞아서 복음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석 자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전하는 것이 복
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입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복음을 권위 있게 전하고 복
음을 능력 있게 전하고 복음을 표적과 이적 속에 나타나게 해 주시옵소서.
너희가 복음을 전할 때 표적이 일어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에 관해서, 부활에 관해서, 휴거에 관해서, 지상천국에 관해
서, 메시아 강림에 대해서, 창조 목적에 대해서 전하면 누구든지 복음의 기적과 이적이 나
타난다고 했으니 이 복음들이 체질화되어서 이제는 창조 목적을 이루며, 또한 우리는 육신
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인 정신적인 생활의 부활을 하면서 복음이 체질화돼서 가고 있사오니
모두 그렇게 더욱 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의와 사랑과 진리를 이들에게 함께해 주시고 주관해 주시옵소서.
복음을 넣으면 사탄과 귀신이 나가고 영들이 나간다고 했습니다. 은혜와 은총을 더해
주시옵소서.
내가 이들을 축복하오니 잘되고 형통되고 은혜를 더해 주시옵소서. 하늘 영광의 뜻에
모든 일군을 삼으사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손발로 하나님이 써 주시옵소서.
복음의 기구들이 되게 해 주시고 복음의 주인들, 복음이 체질화되고 말씀이 우리 육신
화돼서 생활함이 충만케 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육신으로 보고 말씀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만물을 보고 깨닫듯이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서 말씀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말씀의 근본을 깨닫게 더욱 함
께해 주시옵소서.
내가 축복하니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책임을 느끼고 가게 해 주시고 의로 채워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