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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말씀2015.07.15 (수)

수요

선포일
2015.07.15 (수)
성경 본문
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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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1 2015년 07월 15일 수요일 [명설교] 시대의 표상 [ 요한복음 14:6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6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1990.4.25.(수요말씀) / 낙성대교회 지난주까지는 지방 순회의 역사를 영상으로 직접 봤습니다. 어떻게 역사를 뛰고, 어떻게 시대의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진행하는가를. 지난주 말씀이 요한복음 14장 6절, 곧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주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야 하늘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말씀으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을 가지고서 1,2부가 모두 화면을 통해서 한 주일동안 지난주에 있었던 전국순회의 경인지방의 역사를 지켜봤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말씀을 제대로 못했는데, 오늘은 보다 구체적인 말씀을 듣겠습니다. 쉽고도 어려운 말씀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요한복음 14장 6절은 어렵다면 어려운 말씀이고 쉽다면 쉬운 말씀으로 이해를 시킬 수 있는데, 상당히 쉽고도 어려운 그런 표현으로 이해를 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에게는 반드시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을 볼지라도 꼭 인생은, 사람은 어떻게 살으라는 길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인간이 성장하면서, 보다 내적과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획한 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사나? 물론 ‘어떻게 살까?’ 우리가 그냥 생각할 때는, 육적인 세계는 여러 가지로 계획이 있지만, 정신적으로 볼 때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게 참 쉽고도 어려운 것이고,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답을 주지 않으면 도저히 길이 없다고 봅니다. 가령 집에다 개를 사다가 기른다고 한다면, 그 개가 어떻게 살까할 때 그냥 밥 먹고, 도둑놈이 오면 짖고, 그냥 앉아 있다가 돌아다니고... 이게 어떻게 살까의 최종적인 개의 최대 목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만물의 영장에 입장에서 뜻을 두고 본다면, 개가 ‘어떻게 살까?’ 하고 고민하고 있으면, 그것을 주인이 봤다면 주인이 어떻게 사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아까 얘기한 것은 개가 사는 것이고. 개가 생각한 것이고. 개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까?" 이 어떻게 살까는 아까 얘기한 그것을 떠나서입니다. 지금 얘기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전편으로 생각한 것은, “어떻게 살까?밥 먹고, 주인이 밥 먹으면 밥 먹고, 도둑놈이 오면 짖고, 이런 것이 어떻게 살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 말고, 또 다른 개는 어떻게 살까 했는데 “어떻게 살아? 밥 먹고, 도둑놈이 오면 짖고, 밤이 되면 잠 안 자고 밤새도록 철야하다가 짖고, 낮에는 잠자고. 이렇게 사는 것이지.” “아니여, 그것이 아녀! 그건 나도 해왔어.” “그럼 뭐 뾰족한 수가 있냐?” “다른 것이 있을 거야.” 그것은 개들이 답을 못 줍니다. 개들끼리는 동네 개가 다 모여도 답을 못 줍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놈, 기는 놈 다 모여도 안 됩니다.어떻게 살까의 그 답을 고민하는 그 개에게는 사람이 등장해야 됩니다. 주인이! 주인이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살까 하는 것은 일반적인 개의 주장에서 아는 것 이상으로 바로 아는 길이 있으니, 그것은 주인이 어떻게 사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주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사는 개는 그 개 자신이 보편적으로 그냥 밥 먹고, 짖고 이 정도에서 떠나서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세계입니다. 그것은 기본으로 알고, 기본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르치면) 기본적인 개의 삶을 벗어나서 가르쳐 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주인이 등산을 가면 따라가기도 하고, 가자는 데 가기도 하고, 또 이렇게 하기도 저렇게 하기도 하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 개로서는 최대의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인을 기쁘게 해 주고, 즐겁게 해 주고, 여러 가지 재롱과, 여러 가지 모든 개로서 사람에게 맞는 일을 해 주면서 사람이 가르쳐 주는 대로 그것을 해 나간다면 개는 10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가장 최대로 개 중에서 보람되게 살고 갔을 것입니다. 다른 개들은 그냥 보편적인 삶을 살다가 갔는데. 그런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길이라는 것은, 인간의 길은 뭐냐?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할까? 우리들을 동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빼놓고 우리끼리 살 때는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하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밥 먹고 일을 하기도 하고 또 존재하기 위해서 삶의 투쟁을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인데, 그걸 다 해도 사람들이 뭐인가 만족을 못하고 `뭔가 있는데....' 그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서 "이렇게 살라." 하는 프로그램을 주어서 그대로 살 때 그 길이 바로 보편성을 떠난 이상적인 삶이 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사람들이 찾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 때에 그것이 하늘로부터 찾는 것인 줄 모르고,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 찾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안 됩니다! 제가, 선생님께서 그것을 일찍이 온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훈련을 받은 일이 있는데, 깨닫게 한 일이 있는데 어느 날 내가 얘기를 했지요. 지금쯤 되면 그런 일을 많이 할 것입니다. 시골에 가면 두꺼운 비료부대가 있습니다. 그 비료포대에다 개구리를 잡아다가, 반 포대를 잡아놓고서, 지금 선생님 고향에 가면,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2 아까 거기서 물을 떠 왔다고 물을 먹었는데, 반쯤 담아다가 위의 뚜껑을 열어놓고 세워 놨습니다. 여기가 미끄러우니까 (개구리가) 못 뛰어 올라갔습니다. 뛰어올라가도 또 내려오고, 뛰어올라가도 또 내려오고 그랬습니다. 밤에 졸려서 밤 1시나, 2시 즈음에 냉수목욕을 하라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아까 애들이 잡아다 넣은 개구리가 거기서 버리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놈들은 다 포기하고 자는데, 그 중 한마리가 뛰었습니다. 그런데 뛰어봤자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반도 못 올라옵니다. 너무 높기 때문에. 뛰어봤자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평생 뛰어도 못 넘어간다고 느꼈어요. 반이 찼는데, 뛰었다가 내려왔다 뛰었다가 내려왔다 그랬습니다. 목욕을 다 할 때까지도 뽀스락뽀스락 거렸습니다. 플래시를 비춰보며 가만 쳐다보니까, 뛰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게 바로 다른 세계로 벗어나려고 하는 그 광경이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개구리가 아니고, 삶의 애착심이 심히 강한 개구리였습니다. 잘 생긴 것도 없고 특별히 눈깔이 큰 것도 아닌데, 입이 더 찢어진 것도 아닌데,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니 꼴도 내 꼴과 똑같다.” “나도 밤 3시에 일어나서, 더 살려고 버리적 거리는 것인데 개구리 너도..." 이것이 3시까지 버리적 거렸으니, 여러 수천 번은 했을 것입니다. “야 지구력이 대단하다. 2시 3시까지 그렇게 뛰었는데, 그래도 또 뛰고 있으니... 야 초저녁에 뛰어 넘어가지 못했으면 지금 못 뛰어 넘어간다. 지금까지도 못 뛰었으면 안 된다.” 딴 놈들은 다 포기하고 “에라.” 하고 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놈은 뭔가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이면 전부 씻어서 솥에 넣고 삶아 먹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무튼 참으로 지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은 그냥 들어왔을까요? 내 자신을 거기에다 포함을 시켰습니다. ‘내가 저렇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입장이, 개구리 신세와 똑같구나! 아, 그렇지, 그러하구 말구! 나도 이렇게 살려고 발버둥 치며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냉수목욕을 하고..’ 딴 놈들은 다 잤습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잠자는 개구리들과 똑같더라구요. 나만 유난히 나타나서 냉수욕을 하는 것입니다. 좀 확대시켜보면, 온 마을이 조용하고 멀리 떨어진 곳은 보이지 않지만 영적으로 보면 다 자고 있습니다. 나 혼자 발버둥치는 그 모습이 개구리가 뛰는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개구리가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의 사람이 개구리와 똑같고, 나는 하나님 같았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한 마리를 딱 쥐었습니다. 딱 쥐고서 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밤에, 가만 있었습니다. 이제 안 뛰어도 되지요. 내가 내어놓은 것을 그 개구리가 알까요? 모릅니다! 내가 뭐하는 사람인가도 모르고 잘 모를 것입니다. 그 개구리가 그걸 깨달을 때까지 살려면 아마 천년은 살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는 마음을 주기 전에는 절대 못 깨닫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베드로에게 깨닫게 하는 마음을 주었기 때문에 주님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그냥은 못 깨닫습니다. 신의 영력과 권능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이 깨닫게끔 사람이 기도를 하면 동물일지라도 그 머리가 깨달아집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야 사람이 깨닫게 기도해 주면 깨달아집니다. 혹시 다음날 아침에 애들이 다시 잡아서 넣을까봐 저쪽까지 배웅을 해 줬습니다. 빨리 뛰어 도망가라고! ‘아하, 맞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특별히 잡아당겨 주었지! 다른 놈들은 다 솥뚜껑 씌우고 나를 이렇게 했지. 맞아!’ 그날 새벽에 그것을 느끼고서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삶에 대한 그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셨다. 보시고 개구리를 내놓듯이 내 놨다. 틀림없어! 맞아! 틀림없어, 맞아! 맞아! 내가 한량없이 발버둥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손길을 내밀었어. 개구리는 나를 못 깨달았지만 나는 깨달아. 하나님이 나를 내 놨어! 틀림없어! 이걸 통해서 나는 믿어!' 자연계시를 통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한 단계 높은 단계를 본인은 못 깨닫습니다. 못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하는 것을 못 깨닫는다는 그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러나 개구리를 통해서는 깨달았습니다. 개구리를 통해서 "그와 같이 그러하다." 하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높은 단계는 반드시 낮은 단계를 통해서 깨닫게 해 줍니다. 자기보다 높은 단계는 절대 못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지구가 돈다." "맞아! 돈다. 다 돈다고 하는데 나만 안 돈다고 할 수 있나? 돌지!" 그런데 확인 안 하면 잘 모릅니다. 근거를 제시하라 하면 잘 못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통해서 확인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돌고 있구나. 맞아. 돌고 있어. 그러니까 해가 왔다 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왔다 갔다 하지. 맞아! 돌아." 이렇게 확인하는 길이 있습니다. 길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찾는 그런 길 말고, 아까 얘기한 것같이 개구리가 찾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찾아봤자 개구리 차원밖에 길을 못 찾습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세계는 내가 손을 들어서 갖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놨다는 것입니다. 이게 길을 찾은 것이라 그것입니다. 개구리는 길을 찾았습니다. 무슨 길을? 생명길을 찾았습니다. 길을 찾으니까 생명이 되었고, 진리가 되었습니다.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3 하나님이 진리의 근본체가 되시고, 또 생명의 근본체가 되셨습니다. 개구리에게는 생명이 다시 되었다 그것입니다. 나머지 개구리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영적 나머지 사람들은 다 죽었다. 나는 살았다. 그것이 개구리이기 때문에 그렇지, 사람이라면 또 끄집어 내야 되지 않겠냐. ' 이 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기도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 중에 다시금 힘을 얻게 되었고, 또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면 여러분들도 많이 깨달아질 것입니다. ‘아 맞아, 이와 같이 나에게 함께해 주셨어! 맞아!' 그것을 깨닫는 것이 도입니다. 도는 직설적으로 깨닫는 것도 있지만, 만물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자연 과학을 통해서 계시가 온다고 했지요? 자연과학을 통해서 계시가 정확히 오는 것입니다. 꿈을 통해서 오는 것도 있고, 자연과학을 통해서 오는 것도 있고, 만물을 통해서 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때 내가 만물을 통해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뛴 보람이 이고, 밤잠을 못자고 몸부림을 친 보람이 있는 개구리라고 몇 번이나 단상에서 비유를 들어 그 실제 이야기를 하니까 여러분들은 더 감명스러울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개구리가. 여러분들도 무엇인가를 깨닫고 통해서 길을 찾았지요? 그러니까 이 길이라는 것은, 형이하학적인 사람이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 못 찾습니다. 찾아봤자 사람 속에 있는 길밖에 못 찾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길은 하나님이 나타나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절대 그 길은 못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영혼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은 육신을 살리는 길이 아닙니다. 영혼을 살리는 길때문에! 영혼을 살리는 길이 먼저 결정되면, 육신을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얘기하고 선포한 말씀같이, 죽은 영혼이 다시 사는 것처럼 또 인생의 행동적으로 죽은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행동적인 삶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과 육이 생활적으로 부활된다는 것입니다. 길을 찾게 되면. 길을 찾게 되면 영과 육이 생활적으로 부활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겁한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이후 시대가 그 어떤 이상적인 삶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치 개구리가 박박 뛰는 것과 똑같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섭리해 주셨고, 그리고 여호수아를 보내서 섭리해 주셨고, 많은 선지자를 통해서 섭리해 주셨고, 아브라함이나 노아를 통해서 섭리해 왔습니다. 그들이 인생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찾은 것이 바로 종들 시대에 그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그게 길이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길! 하나님의 그 정통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그 나름대로의 길이었습니다. 이방에서는 그 나름대로 또 이방의 세계에서 양심을 찾아서 찾아온 것, 그게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통해서, 양심을 통해서 찾아오는 것이 길이었는데 모두 수준 이하의 길입니다. 길을 찾은 것이 잘못 찾으면 사람이 찾은 길이 돼서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낫지만, 조금 위에 있는 길밖에 못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 인도하시고 말씀을 주시고 법을 주시고 뜻을 주시고 한 길은 그래도 구약시대였지만 그 나름대로 사람들이 찾은 길보다는 훨씬 이상적인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해서 길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탈락됐다" "타락됐다" "낙오됐다" "부패됐다" 이런 여러 가지로 표현되는 세계로 파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약시대 때 말씀을 중심해서 따랐던 사람들이 길을 찾았다고 했지만, 그 길은 가시밭길보다 조금 나은 산골짝의 소롯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가시밭길보다는 나은. 하나님을 안 믿고 살았던 시대는 가시밭길로 엉금엉금 간 것과 같습니다. 길은 길이지요. 그런데 그 고통과 고해와 아픔과 찔림과 상함과, 전진할 수 없고, 절벽길로 다치고, 또 질주할 수 없고 전진할 수 없는 길, 그것도 가면 길은 길이지만 그러한 고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통한 길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래도 산골짝의 등산로 같은 길 정도는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걸어서 다 가겠습니까. 거기에 대관령 한계령 같이 길을 냈습니다. 그 꼬불꼬불한 길, 소롯길, 모두 걸어서만 넘어 다니던 것이 이제 큰 대 길이 되었습니다. 이제 버스도 다니고 자가용도 다니고, 이런 길같이 된 것이 신약시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길, 꼬불꼬불한 길. 이런 길을 확장해서 6미터 8미터 12미터 확장해서 길을 내놓은 것을 보면, 설악산 한계령 대관령, 이런 길들을 보면 소롯길에서 큰 길이 났지요. 구약은 소롯길 같은 길이고, 구약에서 안 믿던 사람들은 마치 가시덤불로 그냥 막 나무하며 다니던 사람의 길과 똑같습니다. 그것은 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짐승들이나 왔다 갔다 하지요. 그리고 구약에서 율법을 중심해서 모두 오던 길들이 그나마 산골짝에 있는 소롯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 때 예수님이 오셔서는 마치 차가 다닐 수 있는 한계령 고개를 꼬불꼬불 길을 낸 것같이 내어 놨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약 시대 때는 어떤 길이냐? 그 길보다는 더 좋은, 뻥 구멍을 뚫어서 직통할 수 있는 길이냐? 그 길보다 더 좋은, 비행기를 타고서 휭 지나가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인 영적인 최첨단의 세계! 비행기의 항공 길로 쑥 넘어가버리면 뭘 꼬불꼬불 왔다 갔다, 이것저것 재며 올라갑니까? 그냥 쓱 지나가버리면 끝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 길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가시덤불 길이 필요 없고, 아무리 지상에 도로가 잘 뚫렸어도, 지상세계의 길이 좋다고 해서 비행기가 더 잘 가고 못가는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4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최첨단의 성약 역사의 길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길로 역사를 표현할진대 그렇습니다. ‘길’에 대해서 제가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하셨는고 하니 "길 이라는 것은, 길은 마치 무엇인고 하니, 곧 <역사>라는 말이다." 그랬습니다. 길을 <역사>로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했더니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만, 우리 인생의 모든 길들은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말씀이 간 곳이 바로 역사가 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참된 역사가 되었노라. 그 길의 표상들이 노아 때에는 노아가, 아브라함 때에는 아브라함이, 모세 때에는 모세가, 요셉 때는 요셉이, 여호수아 때에는 여호수아가, 많은 선지자들 때는 선지자들이 그 시대의 길이 되고 표상이 되어서 연결시켜 왔노라." 했습니다. 참된 역사가운데 참된 진리가 솟구치게 되었고, 진리가 가는 곳에 참된 생명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란 단어를 놓고 볼 때 그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찾는데, 아까 얘기한 대로 하늘은 가장 절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길을 찾았습니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이고 모든 심리적으로, 양심적으로 길을 찾았는데 그런 길들은 아까 얘기한 대로 ‘인생의 한계’ 안에서 다만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떤 형태를 벗어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을 달리는 차는 아무리 길을 잘 닦아도 땅에서 달려야 됩니다. 비행기는 길이 닦여진 것과 안 닦여진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뜨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아프리카 밀림지역의 상공을 날지라도 가는 것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백만분의 일도 차이가 없습니다. 길을 잘 닦아 놓은 고속도로 위를 난다 해서 더 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왜? 전혀 다른 세계에서 놀기 때문에!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달리기 때문에! 그와 같이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성! 우리 인간은 길을 찾아도 한계 이상을 못 벗어나고 한계 안에서 길을 찾고 있습니다. 니이체 같은 유명한 철학자도 길을 찾으러 쫓아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습니다. 찾아봤자 자기도 만족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도 만족치 못한 그 길을 딴 사람들이 영원히 갈 수 없다 생각하고, 다시금 7년 동안 산길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도의 길을 찾았지만, 학문을 통한 철학의 길을 찾았지만 철학을 통해서 길을 찾았지만 못 찾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길을 찾았을까?’ 하고 가보았지만, 그들도 못 찾은 것을 보고, "하나님이 없구나. 죽었구나! 있다면 이렇게 놔 둘 리가 만무하다. 오히려 내 주관을 내세우는 것이 낫겠다. 그래도 그것이 낫겠다." 했습니다. 여기 있는 선생님도 길을 많이 찾았습니다. 길을 찾았는데, 바로 그런 길들을 찾았습니다. 사람에 해당되는 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가지고는 나도 만족치 못하고, 그리고 이 길을 가지고는 모든 사람이 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들인고 하니 선한 일들을 많이 하는 일과, 악한 일을 버리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들과,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일들과, 그리고 삶의 경제권의 세계에서 보다 소롯길을 벗어난 일들과.. 이런 것들이 최대의 길들이라고 하며 나름대로 더 이상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착하게 살았을 때 그 기쁨을 누리고, 그리고 이웃을 위해 살았을 때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게 길로 생각하면서 역시 마음을 굳히며 행하였지만, 그런 일은 보편적으로 누구든지 다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수천 가지 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백 가지 길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길들은 나뿐만 아니라 다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길은 나도 만족치 못하고 모든 사람이 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산에 갖다 놓으면 지가 걸어갈 때 낫으로 치고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대개 괭이를 파고 간다는 갑니다. 그런 길은 산에 갖다 놓으면, 괭이나 낫이 다 있으니까 그런 길은 각각 다 내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런데 불도저를 갖다가 싹 밀어붙이고 넓은 길을 내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못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찍어서 낼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이 하늘로부터 시대에 준 말씀이, 선생님이 준 말씀이,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시대에 그런 말씀을 가지고 와서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사람으로 표현하면 그 자신이 길이 되고 생명이 되고, 그리고 진리가 됩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분석하게 되면 다른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영과 육과 혼이다! 진리, 참! 참에는 생명이 생기니까. 참된 길에는 진리가 서게 되고, 철길 위에 천리마가 왔다 갔다 하듯이. 천리마 위에는 생명이 왔다 갔다 하지요. 이런 입장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길을 못 찾아 많은 사람이 얼마나 방황하고 당황합니까. 길을 못 찾아서 얼마나 고생합니까. 여러분들은 밤중에 길을 못 찾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길을 묻고 또 묻는 사람이 있지요? 여러분들이 길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서는 길을 못 찾습니다. 아는 사람이 가르쳐 줄 수밖에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 얘기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길을 못 찾을 때 방황하는 것같이 인생길을 못 찾아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황하는지.. 이것은 누구든지 동일합니다. 꼭 그렇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일반적인 길들은 모두 사람들이 찾으려고 하지만, 그 길은 찾아봤자 찾아놔도 그렇게 만족이 없고 근본 문제가 청산이 안 됩니다. 인생의 일반적인 길은 다 나름대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된 참된 길, 이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막막한 바다 위를 쳐다보면서 어떤 길이 뱃길이냐고 물어보면 찾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5 선장 외에는 모릅니다. 선장과 나침반과, 수십 년 동안 그 길을 연구한 사람 외에는 모릅니다. “육지의 길을 닦을 때에는 어렵지만 바다위로는 배만 가면 되겠다." 하지만 바다의 길을 닦는데도 역시 수년씩 걸린답니다. 암초가 있나 1000미터를 확인하는 데만 한 달씩 걸린답니다. 암초의 깊이와 바다의 깊이를 전부 조사해서 길을 내는 것입니다. 암초가 없는 곳으로 길을 내는 것입니다. 그 길만 안전하고 다른 데는 암초가 있기에 안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길을 아는 사람만 알지 모릅니다. 또한 하늘을 딱 쳐다봤을 때 누가 비행기가 다니는 항로를 알겠습니까? 그냥은 모릅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비행기가 왜 저기로만 가나?" 했습니다. 그것은 그래도 유식한 무식입니다. 유식한 자로서 무식이지, 그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요. 여러분들도 다 그랬지요? “왜 저기로만 가나? 이상하네..” 항로 길이 있기 때문에. 기류가 있기 때문에. 또 "아이고, 왜 저렇게 삐뚤빼뚤 가냐?" 하지만 공기 기류가 있기 때문에 반듯하게 갈 수 있지만 꼬불꼬불하게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공기가 없는 데로 가면 후두둑 떨어집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가면서 내가 탄 비행기가 반듯하게 못가고 돌아서 가는 것을 분명히 봤습니다. 거기에 기류가 있기 때문에 절대 무공(無空) 기류는 공중에 암초가 있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그 곳을 지나면 10미터 20미터 툭 떨어집니다. 떨어지다가 공기가 있는 곳에 가면 서기는 하지만, 차 가다가 브레이크를 잡은 것만큼 출렁하는데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그러다가 떨어지는 비행기도 많이 있지요. 이와 같이 다 닦아 놓은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중심해서 신약을 닦아 놓은 길이 있고, 신약을 중심해서 성약의 닦아 놓은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구약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더 완전케 하러 왔다."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길을 가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가셨습니다. 성약의 말씀을 볼지라도 신약의 말씀을 중심해서 더 이 시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지 신약말씀을 무시하고 선포하지 않습니다. 신약말씀에 “뭘 갖고 심판을 하냐? 불 갖고 한다. 즉 진리를 갖고 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고, 더 좋은 말씀을 시대에 더 높은 차원을 줄 뿐이지 그것을 기본으로 하지 않고는 안 합니다. 신약말씀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신약말씀을 더 이루러 오지, 더 빛나게 하러 오는 것입니다. 기본기를 중심해서 하고, 기본기를 무시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기본기를 중심해서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신 것은, 길도 되고 진리도 되고 생명이 되는 예수를 떠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메시아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떠나면 절대로 허용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차가 길을 떠나서 존재하겠습니까? 그게 탈선이고 사고지요. 길을 떠나게 되면 진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법칙을 벗어난 길입니다. 궤도 법칙을 벗어난 길이기 때문에 결국 생명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길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가끔 섭리권에도 보면 길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 그 존재의 핵심지를 벗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떻게 되느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파괴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길을 벗어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친다고 배가 뱃길을 벗어나면 암초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래서 잠언 집에도 이러한 잠언이 나옵니다. "파도가 친다고 항로를 벗어나지 마라. 항로를 벗어나다가 암초에 부딪혀 크게 파선함을 받으리라. 파도에 배가 부서지는 일은 아주 극소수니라. 다만 겁이 날뿐이지. 두려울 뿐이지." 암초는 우선 안 보이니까 무섭고 두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파도가 안 치는 곳에만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파도가 안 친다고 자꾸 바닷가로만 가면 배가 100% 파선됩니다. 암초는 다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파도가 쳐도 가운데로 깊은 바다로 들어가야 암초에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알고 여러분들도 많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다고 해서 자꾸 궤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존재하는 것은 초등학교 상식이지만 궤도를 벗어나지 않지 않습니까. 궤도만 벗어나면 완전히 끝나니까. 구심력과 원심력에 의해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으므로 제대로 그 길을 갑니다. 모든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들이 잘 자전 공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름답고 멋있고 보다 미가 있다는 것은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그 인생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 뜻한 바를 가지고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꾸준히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아름답고 멋있고 가치 있고, 그리고 그 미적인 것이 얼마나 굄을 받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궤도를 벗어났다는 것을 후진 말로 말할 것 같으면 참 꼴이 바라보이고, 정말로 무가치하고 한스러운 것이 말할 수 없이 폭발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의 궤도를 벗어나지 말고, 섭리의 길을 벗어나지 마요. 섭리라는 것도 하나의 길입니다. 길을 발견하여 길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길을 벗어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애들을 통해서 가끔 들어보는데 정말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직접 만나보지 않습니다. 왜? 내 심령이 병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의 괴로움이 너무 강하게 부딪쳐 옵니다.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6 그 파문이 너무너무 웅장하고 커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차가 가다가 도로에서 벗어났을 때 그 다친 사람의 아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 순간뿐이겠습니까? 평생의 운명이 좌우되고 완전히 병신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길을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 되겠습니다. 핍박이 올지라도, 어려움이 올지라도, 눈물겨운 일이 있을지라도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온 인류는 지금도 길을 못 찾고 있습니다. 어떤 길이냐? 고차원적인 길입니다.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기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서울을 가는데 고속도로로 가면 좀 편하게 가겠지. 국도도 그 나름대로 재밌더라. 서울 가는 데 까짓 거 좀 늦어서 그렇지 걸어가도 발바닥이 부르터서 그렇지 그 나름대로 괜찮더라.“ 그런 정도의 차원을 두고 얘기하는데, 선생님이 직접 그것을 표현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다릅니다! 서울이 아닙니다. 또 오는 길도 고통스럽고, 또 힘들지만 가는 궤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흔히 보면 서울 가는데, “힘들고 발병이 나서 그렇고, 또 리어카를 타고 가는데 좀 늦어서 딴 사람보다 그 좋은 곳에 닷새 늦게 참석해서 그렇지 가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흔히들 얘기합니다. 종교를 설명할 때도 그럽니다. "기독교? 장로교? 불교, 유교 할 것 없이 차원만 다를 뿐이지 목적지는 같아.“ 그지만 그것은 너무 부시멘적인 설명입니다. 참조:부시멘(Bushmen; 아프리카 흑인의 일종으로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Kalahari) 사막에 살고 있는 수렵민, 키가 작고 (약 152cm)  허리는 구부정하며 엉덩이가 툭 불거졌음. 내가 시대의 구원의 근본을 외치는 사람으로 왔기 때문에 확실히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저녁에 똑똑히 짚고 넘어갑시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우리끼리라도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를 포함해서 과거에 그런 길을 갔던 사람입니다. 자, 불교를 봅시다. 불교의 그 길은 육신의 곤욕이 너무너무 셉니다. 3천 번씩 절을 합니다. 그래야 돌로 새긴 부처가 눈을 떠서 본다는데, 말이 그렇지 사실은 눈을 떠서 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3천 번 절을 하면 부처가 조금 눈을 떠 본답니다. "정성이 지극하구나." 한다는데, 그것은 자기 자각이지 실제는 안 그렇습니다. 십억 만 번 절을 한다고 해도 눈을 떠 본다던가 고개를 숙인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죽은 조상에게 절을 한다면 한 번만 절을 해도 확실하게 눈알이 튕겨쳐 나올 정도로 눈을 뜨면서 "이게 웬일이냐? 이거 과분해서 어떻게 하지?" 하고서 똥구멍이 깨질 정도로 털퍼덕 주저앉습니다. 백팔번뇌라는 말도 있지만 너무너무 고뇌가 많습니다. 세상과 동떨어져서 너무 적적하고 고독하고 쓸쓸한 그 세계를 가는 것이 불교인들이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앉아 있습니다. 불교는 지금도 (이런 의자가 있는지 모르지만) 거진 무릎을 꿇고서 설법을 듣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너무너무 떨어져 있습니다. 아까 얘기한 개구리가 뛰는 식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너무너무 혹사적인 것이 심히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교에서 오신 분들이 있지요? 모두 해 봤지요? 내가 국민학교 때부터 세밀하게 지켜봤습니다. 왜? 이런 세계적인 구원의 일을 손대러 와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계획적으로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절간마다 돌아다니며 보았습니다. 기독교에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스님들의 수도길, 피눈물 나는 수도길.. 다리가 저리고 쑤시고 아픈 그 수도생활.. 정말로 남다른 곤욕의 길에 깊이 들어가서 생활합니다. 깊이 가면 갈수록 도대체 닦을 수 없는 그 어려움을 닦고 있습니다. 닦는다는 것은 깎아내는 것입니다. 뼈와 살을 깎아내듯이 깎는다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다 하는데, 도 닦는다는 말은 불교에서 가장 많이 씁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1천 번씩 2천 번씩 3천 번씩 절을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절하는 것을 봤습니까? 못 봤지요? 설교만 한 30분 들으면 끝납니다. 찬송 몇 번 부르고 헌금하면 끝납니다. 상당히 자유로운 종교입니다. 너무너무 자유롭고 너무너무 고차원적이고, 고뇌와 번민과 고통을 벗어난 종교입니다. 비교를 해 봐요. 그런가 안 그런가. 그래서 차이가 굉장히 많습니다. 하는 것을 보면 수준차이가 많습니다. 불교는 일단 머리를 깎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절에 들어가고 싶어도 머리를 깎는 것 때문에 못가겠다고 합니다. 머리를 한번 깎아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너무너무 부끄럽습니다. 여러분들 어렸을 때 할아버지들이 마빡까지 싹싹 밀어 놨을 때도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지요. 나는 다 컸을 때까지도 배코칼로 밀어놔서 꼭 모자를 쓰고 다녔습니다. 이와 같이 스님이 되려면 그런 창피와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려야 됩니다. 기독교는 볶으려면 볶고, 기르려면 기릅니다. 기독교에 삼손이 있었지, 불교에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상당히 머리기 길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머리를 빡빡 밀어 놓으면 대추 방망이같이 보기 싫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지 않으면 머리로 인물을 커버할 수 있습니다. 나도 오늘 머리를 깎고 다듬었더니 단정하게 보이고, 인물이 또 다른 폼이 납니다. 머리를 깎아 버리면 도대체 다른 폼을 낼 길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 머리 가지고 인물이 상당히 좌우됩니다. 인물에 자신이 없을 때가 있으면,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길은 머리 하나입니다. 머리를 좀 짧게 깎든지, 파마를 하든지, 옆으로 살살 멋있게 다듬는 것이 있습니다.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7 “얼굴이 자신이 없으니까 머리로 내가 인물을 내려고 하니까 부탁합니다.” 하고서 한 2000원만 더 주면 아주 멋있게 빼놓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것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또 하나, 전문자가 되려면 중 옷을 입어야 됩니다. 그것을 입고 다니면 "중! 저 중!" 그럽니다. 의상부터 사회에서 우러러 보는 의상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중 의상을 입으면, 나도 중 의상을 입으면 바깥에 나가면, 머리 깎아 놓으면 폼이 안 납니다. 정말 폼이 안 납니다. 깎아 봐야 알겠다고 하지 마세요. 나는 내 머리에 대해서 압니다. 이발사가 이발을 조금만 잘 못 해 놔도 다시 깎으라고 하는데, 머리를 싹 밀어 놔 보십시오. 얼마나 보기 싫은가. 나는 중이 입는 재색을 제일 싫어합니다. 중 색깔 옷을 제일 싫어합니다. 검은색 옷을 입으면 입었지 그 옷을 안 입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그 옷을 입으면 폼이 안 납니다. 그 옷 입고 폼이 날 자신이 있는 사람은 나한테 와보라는 것입니다. 여자고 남자고 그 옷을 입으면 폼이 안 납니다. 기독교는 자유롭습니다. 불교는 자꾸 산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기독교는 자꾸 성장할수록 사회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하나 됩니다. 이런 식으로 다릅니다. 기독교는 먹는 음식을 볼 때도 웬만하면 다 먹습니다. 멍멍탕까지 다 먹은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교는 멍멍탕은 고사하고 비린내 나는 것을 먹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자유가 없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멋, 패션, 이런 것이 다 천국입니다. 육신을 쓰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정된 세계에 집어넣고서. 그렇기 때문에 차이가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교를 해 주는 것입니다. 길에 대한 비교를. 인생 삶의 생활에 대한 비교를. 먹는 것에 지장이 참 많아요. 요즘은 불교가 개방된 편입니다. 범석 총무가 그랬습니다. 범석 총무가 잘 가던 음식점이 있는데 어느 날 가보았더니, 머리를 길게 늘여서 보는 사람이 `머리 좀 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앉아 있더랍니다. ‘머리 좀 깎았으면.. 겨울철도 아닌데 머리를 길게 하고 있냐.’ 그 생각을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술도 한 잔 마시고 했는데 돼지고기를 아주 잘 먹더랍니다. 범석이가 그 전에 여기 오기 전에 일입니다. 그 사람이 나간 후에 주인아주머니한테 "그 사람, 참 푸짐하게 먹고 나가네요! 그런데 머리 좀 깎고 다니지..."그랬더니만 아주머니가 귀 좀 빌리자고 하더니 "스님입니다." 하더랍니다. 스님이 장발을 하고 와서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고 가서 "참 푸짐하게 먹고 간다." 그랬더니만 그 아주머니가 심정모르는 이야기를 하니까 한마디 해 준 것입니다. "스님입니다. 어느 절의 스님입니다. 밤만 되면 저렇게 나오셔서 돼지고기를 몇 근씩 먹고 들어가십니다." "그럼 멍멍탕도 먹겠네요?" "멍멍탕은 우리가 안 하니까 모르는데, 한번은 여기도 멍멍탕을 하냐고 슬쩍 묻는 것을 보니까 그것도 먹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서 보다 개방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교에서도 원불교는 그런 것을 개방해서 머리도 안 깎고 고기도 먹습니다. 결혼식도 합니다. 스님들은 결혼을 안 하지 않습니까. 이런 여러 가지로 볼 때 차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예수를 코치하신 분은 하나님이고, 석가를 코치한 분은 누구냐? 냉철하게 따질 때는 물론 하나님이 그 나름대로 역사를 했다고 하지만, 그냥 따질 때는 스스로 닦았다는 것입니다. 왜? 석가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소리는 안 했습니다. 불교 전경에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깨우쳐 줬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줬다.” 하는 소리를 안 했기 때문에, 본인이 깨달았기 때문에 ‘인간의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길. 길은 길이지요. 그런데 사람이 손으로 닦은 길 하고, 불도저로 닦은 길 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무를 가지고 만든 것 하고 쇠붙이를 갖고 비행기를 만든 것 하고는 차이가 있듯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입는 것도 천국입니다. 새 옷을 사 입으면 그렇게 기쁘지요? 천국에 가면 그렇게 삼박한 기쁜 것이 있습니다. 또 먹는 것도 먹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기쁘고 희락이 있는데, 몇 가지만 먹는 사람은 맛을 몇 가지만 느끼기 때문에 희락에 그만큼 제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안식교는 구약을 좇고 있습니다. 완전히 구약을 좇기 때문에 구시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통일교도 구약을 많이 좇고 있습니다. 구약을 많이 좇고 있습니다. 왜? 구약에 있는 근본만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해석을 못합니다. 딱 나 하나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통일교는 보다 새로운 역사를 뛴다고 뛰었지만 신광야에서 놀았기 때문에 보다 구약적인 세계라고 선생님만이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딱 쳐다보면 아니까! 나는 성경만 연구했기 때문에 딱 쳐다보면 압니다. 어느 종교든지 그냥 쳐다보기만 하면 압니다. 앞으로는 종교를 다루는 근본을 선생님이 가르쳐 주겠습니다.내가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웬만하면 안 하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얼마만큼 이상적인 세계로 왔는지를 내가 안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다 똑같이 반지를 끼고 다니니까 다 똑같은 반지인줄 알지만 이 반지 저 반지 다 다릅니다. 석수 차이가 있을 것이고, 모조품도 있습니다. 모조품 큰 놈이 있으니까 그 놈이 크다고 따라가는 어린아이와 똑같습니다. “왜 그렇게 반지가 크냐?” “이것 바꿨어요. 한나절 동안 졸랐더니 바꿔줬어요.” “이것 모조품이다. 엿밖에 못 사먹는다. 빨리 가서 바꿔와.” 이와 같이 여러분들이 지금 가는 길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나나 가치 있는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8 길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하면 압니다. 그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안 했는데 오늘부터 얘기를 하게 되네요. 하늘이 이야기를 하네요. 왜? 길에 대해서 얘기하고, 길의 차원을 이야기를 하려니까 천상천하로 말씀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믿습니까? 닦는 것은 나도 산에 있을 때 꽤 많이 닦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닦는 길은 역시 인간 안의 수준급적인 한계 안에 있는 길들이라는 것을 이미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봉천동에 있을 때 한 4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한 스님이 찾아 왔었습니다. 그때 내가 그 스님에게 "석가가 이미 닦아 놓은 길을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뭘 본인이 다시 닦고 있습니까?" 했더니 몰랐습니다. 그림을 그려 보여 주며 “석가 스승이 닦아 놓은 그 길로 따라가면 되는데, 당신은 왜 또 40년 동안 닦았습니까?” 했습니다. 닦은 것을 또 닦고 하니까 거기서만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서 계속 가기 때문에 그 길이 무한정으로 끝이 없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석가 살아 있을 때 인간 인위적인 것으로 당세만 닦아 놓았기 때문에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 스님의 말이 자기가 그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이미 닦은 길로 가면 되지, 뭘 그 닦은 길을 또 40년 동안 닦았냐고 하니까 자기가 40년 동안 닦은 후에 인생의 허무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허무하구나.” 그러니까 ‘허무’ 이 두자를 깨달았답니다.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 때 깨달았다." 했습니다. 어떻게 깨달았는고 하니, 철학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4학년 때 깨달았습니다. ‘참 허무하다.’ 왜? ‘묘’를 쳐다보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놈도 기는 놈도 다 죽어서 거기로 들어가니까 인생이 허무하다.’ 석가도 허무한 것을 깨달았지요? 그런데 허무하지 않은 길을 가르쳐 준 것이 "선하게 착하게 살라." 이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보다 ‘영원한 길을 가도록 하는 그 세계’를 말씀했습니다. 아까 이야기 한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고, 석가는 하나님이 인도했다는 소리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냥 깨닫고 신이 있다고 했을 뿐입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야, 석가가 설산에 들어가서 누구를 불렀을까?” 신을 불렀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인 이름을 부르면서 "석가야, 석가야! 너 내 기도 좀 들어다오." 이렇게 안 했을 것이 아닙니까. 신을 부르면서 어디에 길이 있냐고 찾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근본자를 부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까? 하나의 종의 입장입니다. 이방의 종의 입장입니다. 구약적인 이방세계라는 것입니다. 구약역사 바로 밑에 있는 종교라고 그렇게 배워 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불교에서는 "오래 되었으니까 그래도 형님이 아니냐?" 하지만 오래된 것은 골동품밖에 못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냉철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종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왜? 지금도 항상 생방송을 할 수 있으니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렴풋이 그냥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논리를 깔아놓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직접 백마강을 보고 와서, 사람들이 추측하는 그 장소에서 뛰어내려서 물에 닿은 여자는 한 명도 없다고 확실하게 이야기 하듯이! 얼마나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불가사의가 없습니다. 내 앞에는. 그러다가 어디로 가겠느냐? 이 세상 삶에 대한 상대 세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생각 상대 세계! 생각 실상 세계로 간다.”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서 산 것에 대한 실상 세계로 갑니다. 그 수준급에서 살았으면 ‘그 수준의 상대세계’로 가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었을 때는 그 수준의 상대로 갑니다. 그래서 영계를 가 보면 불교 영계가 따로 있습니다. 기독교 영계가 따로 있고. 기독교 중에도 구시대 영계가 따로 있고, 신시대 영계가 따로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주교 영계가 따로 있고, 장로교 영계가 따로 있습니다. 지금 이 지상세계도,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지상 세계’도 기독교 영계가 따로 있어서, 우리 섭리사가 영계가 여기에 따로 있지 않습니까. 여기뿐만 아니라 전국에 쫙 깔려 있지 않습니까. 우리 섭리사 영계는 우리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영계입니다. 왜? 그 수준급이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아예 비교가 안 됩니다. 어린아이와 어른과 비교하듯 치는 입장입니다. 그런 수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계를 가보면 기독교 영계가 따로 있고, 천주교 영계가 따로 있고, 유교 영계가 따로 있고, 불교 영계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건너오느냐? 그것을 ‘믿음’으로 건너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다가도 다시금 목탁을 치고, 산에 가서 절에 가고 그러면 그 영계가 다시 옮겨집니다. 그 수준급으로. 그러면 답답하지요. 못 삽니다. 왜? 큰 옷을 입다가 작은 옷을 못 입듯이. 기독교에서 생활할 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할 때 달동네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불교에 가도 "아, 괜찮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해 동네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혜택 받고 은혜 생활을 하던 불교세계에서는 못삽니다. 다시 건너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요? 그렇기 때문에 "야, 나는 기독교에 다니다가 불교에 가서 이렇게 잘 다닌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싫어서 "너, 거기 가서 한 번 살아봐라." 하고 던진 것입니다. 음식을 먹다가 냄새가 나서 개라도 먹으라고 개에게 줬다 그것입니다. 이렇듯이 한 단계 낮은 세계로 주는 것입니다. 온 지구상을 설명한다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9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원청 못 한 것들이 기독교에 가면 어떻게 다닙니다. 여기서 뜻을 깨닫고 잘 다닌 사람들은 절대 못 다닙니다. 못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법칙상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그런 것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를 보면 영계가, 가는 장소가 다릅니다. 아까 얘기한 대로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지." 하지만 한번 거꾸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와보라는 것입니다. 말하고 실제하고는 다르니까. 사람이 한 시간, 두 시간만 거꾸로 서 있어도 피가 거꾸로 쏠려 뇌가 터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이구, 다 길이 달라서 그렇지, 내내 다 일반이야. 똑같이 서울로 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래?” 하고 따라 갑니다. “아니야. 달라! 길이 다르고, 위치가 달라.” 믿습니까? “길이 다르고, 위치가 달라. 가다가 길이 합쳐지지 않아. 건너뛰어야 된다. 여기로 건너와야 돼.” 건너오기 전에는 그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건너오기 전에는 절대로 우리가 가는 목적지를 못갑니다. 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계에 가서도 건너오기 전에는 못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길이 다릅니다. 길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표현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도 체질이 다 다르고, 다 태(胎)보자기가 다릅니다. 그리고 모두 심리가 다릅니다. 체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똑같은 약을 주면 안 됩니다. 한약을 쓰시는 분들, 양약을 조제하는 약사님들, 모두 다 있지만 같은 증상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은 그 약을 먹고 낫고 또 한 사람은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래서 그 차이가 상당히 크고 크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기독교의 낙원과 불교의 극락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똑같은 금이라도 우리나라의 24금과 저쪽 브라질의 금과는 다릅니다. 똑같은 순금이라도 차이가 많습니다. 색깔 차이가 다릅니다. 그것도 하물며 그러한데, 영계는 더욱 그 차이가 엄청난 세계입니다. 같은 남자라도 미국사람 다르고 한국사람 다릅니다. 생명나무가 붙었다고 해서 같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릅니다. 같은가 한 번 벗겨 보십시오. 성품도 다르고 모두 다릅니다. 차이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여자들도 다 다릅니다. 얼굴이 다르듯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지요? 다 다릅니다. 똑같은 것 같아도 다 다릅니다. 체내에 있는 모든 구조도다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여자들의 선악과도 십억만 명이면 십억만 명이 다 다릅니다. 어떻게 그걸 알았습니까? 그것은 영계에서 배워서 안 것입니다. 그래서 맞다고 박수를 세 번을 쳤습니다. 세 번만 치면 안 된다고 해서 백 번을 쳤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했더니 “얼굴이 다르듯이 다르다고 하라.”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손금이 다르듯이 다르다고 하라." 내가 말하면 백 번 해도 다 틀렸다는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흥분된다고 하지요. 진리를 들으니까 질리겠습니까? 안 질리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것입니다. 종교를 한번 잘못 접하면 10년, 20년, 30년 가다 보면 인생의 젊음은 잠깐입니다. 버뜩입니다. 마치 목련이 피었다가 지는 기간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종교를 한번 잘못 선택하면 참 고생합니다. 여러분들! 친애하는 우리 섭리의 신사 숙녀 여러분! 남녀노소 여러분들! 정말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감격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다음 주에 헌금을 많이 가져 오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헌금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가끔 가만히 있을 때마다 애들이 나를 푹 찌르면서 "누구를 생각하는 거에요?" 그럽니다. "지랄하지 말어. 가만있어. 나 건드리지 마! 나는 지금 감격감사하고 있다." "왜요?" "하필이면 내가 그 많은 길들 중에서 정말로 정통적인 하나님을 믿고, 정통적인 주를 믿고, 정통적인 진리를 내가 깨닫고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스러운지 나는 지금 이 순간도 혼이 빠지게 뿅~ 가고 있다. 너희들은 왜 그걸 모르냐? 너희도 그것 좀 깨닫게 해 줄까? 일주일만 금식해라. 2주일, 3주일을 해야겠어?" 나는 왜 금식도 안 하고 기도생활을 안 해도 늘 평소에 그것을 따끔하게 깨닫습니다. 뜨겁게 깨닫습니다. 그 뜨겁게 깨달은 것을 설교시간에 오면 불이 붙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평소신앙’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늘 감격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끔하게 심판합니다. 완전히 심판합니다. "너, 그럴 수가 있냐? 니가 돼지머리냐? 치타 머리가 좀 돼 봐라. 독수리 머리가 되어 봐라." 꼭 그러함을 받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너무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여러분들 하고 현 기성시대 하고는 차이가 너무너무 많이 있습니다.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들은 진리가 없고, 우리는 진리가 있는데 차이가 많지요! 우리는 문제와 답을 같이 갖고 있고, 현 기성시대는 문제만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엄청나게 차이가 많지요. 구원의 차이가 천 층, 만 층, 구만 층이라는 소리를 들었지요? 같은 건물에 살아도 8층에 사는 사람이 있고, 2층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1층에 사는 사람이 있고, 3층에 사는 사람이 있고, 5층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이가 많습니다. 가격 차이도 많습니다. 시야(視野) 차이도 많습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것입니다. 차도 많은 차들이 있지만, “나도 차 있어.” “나도 차 있어.” 하지만 차도 나름입니다.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10 "나도 돈 있어." “나 돈 있어.” 하지만 그것도 나름입니다. “천 원짜리가 들어있냐, 일 억짜리 수표가 들어있냐?” 나름입니다. "나도 섭리사 뛴다.“ “나도 섭리사 열심히 뛴다.” 이것도 나름입니다. “나도 섭리의 엠에스 뺏지(badge)를 달았어." 해도 그것도 나름입니다. 나는 이렇게 예리하게 따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얘기했나요? 여러분들, 밤잠이 안 올지 모르지만, 심각할 때는 심각해야 됩니다. 나도 하늘로부터 이 진리를 깨달을 때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런 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 단계를 벗어나서 더 위의 단계, 다른 세계에 있으니까, 하여튼 종교에서 아무 종교라도 부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섭리에 오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부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럽게 생각할 것이 뭐 있습니까. 종교는 무조건 깊은 최대 차원의 말씀을 주고, 최대의 말씀을 주는 것, 그것 딱 하나입니다! 최대 근본된 말씀만 주면 최고입니다. 나머지는 자기의 생활 차에 의해 좌우되겠지요. 내가 오늘 낮에 뒷동산에 올라가 봤는데, 나무들이 많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봄에는 죽은 나무인가 산 나무인가를 확인하는 계절이며, 여름에는 무성하게 잎사귀가 피는가, 마음놓고 잎사귀가 만발하게 피는가 확인하며, 가을에는 열매가 맺는가 안 맺는가 확인하고, 겨울에는 상록수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계절이다." 그런 하늘의 유식한 말씀을 했더니만 애들이 "너무 유식한 이야기라 부시멘들은 알아듣기 힘들다." 했습니다. 여러분들, 얼마나 위대한 삶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까. 믿습니까? 얼마나 가치 있는 목적지를 놓고서 우리는 가고 있습니까. 그것이야 말로 얼마나 이상적인 일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진리에 대한 것을 알았지요? 바로 이 시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믿으면 살아납니다. 거기에 생명이 다시 부활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하고 싶은데, 시간상 더 못 하고 이만치만 하면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공자는 “어진 마음을 가지라.” 이게 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곧 진리를 선포하며 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분명코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한테도 꿇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독수리가 어떤 날 동물한테도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독수리가 까마귀를 보고 “야, 나도 좀 저렇게 새카맸으면 좋겠다. 아이고, 왜 나는 ‘뀌-익, 뀌-익’ 하냐? ‘까악 까악’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한이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오늘날 천주교가 "아, 기독교는 너무 좀 소란하다. 우리는 조용한 것을 원한다." 하는데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것입니다. 나를 보십시오. 운동도 하고, 외칠 때는 뼈저리게 신혼골수를 쪼개내는 말씀을 줍니다. 어느 축구선수가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말씀 전할 때는 분명 신(神)이야. 그런데 말씀이 끝나면 분명 사람이야. 그리고 볼을 찰 때 보면 분명 선수야." "그것이 아니다. 자기 신발을 벗는다고 그 신발이 어디 가냐? 신고 다녀도 자기 신발이고 벗어놓고 방에 들어가도 자기 신발이지.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나와 항상 함께 계신다. 운동할 때도 가만히 봐라. 하나님이 함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안산에서 6시간동안 축구를 했는데, 축구 선수들이 4-5시간이 이르니까 도대체 발이 안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대학교의 대표선수들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네들 끼리 "정말로 초인이구나. 정말 초인이야. 맞아!" 했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얼마나 더 하실 수 있습니까?" 했을 때 내가 "잔디가 다 문드러질 때까지 할 수 있다." 했지요. 그렇게 해서 6시간동안 볼을 차고 또 1시간동안 배구를 하는데 그때도 날아다니니까 `아, 세상에! 저럴 수가 있을까?' 했답니다. 그리고 수영장에 가서 3시간동안 수영하고 와서 만나자는 사람들을 다 만나 주고 했으니 정말로 철판이지요, 철판!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우리는 초인을 보았노라."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 말이 맞지요! 자기 나이 또래가 그렇게 해도 놀라는데 자기들보다 배(倍)나 나이를 더 먹은 사람이 그렇게 하니까 얼마나 놀래겠습니까? 사람이 40살이 넘어가면 다리에서 오도독 소리가 꼭 난다고 하더니만 정말로 오도독 소리가 나더라구요. 여러분이 이 말을 적어놨다가 40대가 되면 꼭 보십시오. 반드시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만들어 놨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40이 넘은 지가 옛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신이지요! 나는 맨날 다리통을 잡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이 다리를 철근을 만들어 놨으니 다행이지, 참 큰일 날 뻔 했네요. 정말로 하나님은 구경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을 다 철근으로 만들어 주세요." 하고 기도를 합니다. 이런 것이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누구는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이 길이다." 그랬지만, 우리는 곧 길이 뭐냐? 이 시대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 길이 날 테니까. 시대를 모르니까 모두 자살해 죽고, 길을 모르니까 모두 허탄한 길로 갑니다. 내가 이런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길도 없이 거친 넓은 들에서 갈 길 못 찾아 애쓰며 이리 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내 자신이 길을 못 찾고 돌아다닐 때 원수가 얼마나, 마귀가 얼마나 조롱하겠습니까? 나 길 좀 찾게 해 달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2015_0715 수요(명설교-시대의 표상).hwp11 그리고 나도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 좀 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햇빛이 없어서 도대체 이 등불을 가지고 살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정말로 이제는 ‘해’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길을 찾았습니다! 자신이 길이 되었고, 자신이 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뿅~ 갔지요! 요즘은 다 자기 피알 시대니까. < 기 도 >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우 리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아버지의 길과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교도 해 보았습니다. 비교된 말씀을 영원히 머릿속에 넣고 감격감사 해야 되겠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 비교를 할 줄 몰랐는데 비교를 해 보니까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의와 사랑과 진리로 함께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시대의 가장 고차원적이고 고상하고 위대한 길로 가게 되었으니 이제는 길갈로도 가지 말고, 바벨론으로도 가지 말고 오직 이 길을 찾아 가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라, 저기서 오라 해도 가지 마라.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오직 나만 따라오도록 하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느니라. 오는 한주일 동안도 붙잡아 주시고, 또 우리 여생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신앙의 굳은 각오를 베드로 같은 신념을 통하기를 원하노라.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사랑하심과 은혜가 이 곳을 중심해서 전국 교회와 온 지구촌에 있는 사랑하는 모든 섭리의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해 주시고, 앞으로 섭리를 쫓아 올 모든 자들에게 길을 열어 주사 그들로 사망권에서 생명권으로 건너뛰게 축복해 주시고, 말씀가운데 시험과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기고 승리함이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한 주일 동안도 무슨 일이든지 뜻있고 가치 있는 생활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감사하며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