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2015.08.30 (일)
주일
- 선포일
- 2015.08.30 (일)
-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4장 13
첨부 파일
- PDF
20150830 주일.pdf
290.8 KB
2015_0830 주일(서로 사랑해야 휴거다 구원이다).hwp1
2015년 08월 31일 주일
서로 사랑해야
휴거다. 구원이다
[ 마태복음 24장 13절 ]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but he who stands firm to the end will
be saved.
[ 로마서 10장 13-15절 ]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3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14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15 And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 야고보서 2장 26절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6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할렐루야!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의 평강을 빕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
감동 감화로 역사하시니,
말씀을 들을 때 뜨거운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 오늘은 <구원과 휴거>는
어떻게 이루는지 말씀해 주겠습니다.
◎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성령님, 성자와
하나님이 보낸 시대 구원자가
아무리 사랑해 주며 구원해 줘도
구원받을 본인이 원하고 바라고
사랑하고 행해야 <구원>도 받고
<휴거>도 이룬다.』입니다.
◎ 이 내용을 중심으로
<구원과 휴거>는 어떻게 이루는지
여러 가지로 말씀해 줄 테니,
말씀을 귀히 여기고 본인이
꼭 원하고 행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 휴거시켜 천국에 데리고 가도,
본인이 계속 원하지 않고 싫어하고
천국의 삶을 살지 않으면
결국 천국에서 못 살고 쫓겨나게
됩니다. 마치 처음에는 좋아서
결혼하여 같이 살다가, 살면서 한쪽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 멀어져서
결국에는 헤어지는 격입니다.
말로만 사랑이 아닌 <행동 사랑>을
하고, 실제로 매일 <휴거의 삶>을 살며
행하는 것이 그리 중합니다.
이 삶이 구원의 삶이며, 휴거의
삶입니다. 이 삶을 살아야 성삼위와
구원자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습니다.
◎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서로 사랑해야 휴거다.
구원이다.’입니다.
◎ 말씀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만
구원해 주고 휴거시켜 준다고 해서
같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만
구원해 주고 휴거시켜 준다고 해서
같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구원받을 자 편>에서만
사랑하며 열심히 행한다고 해서
같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과 휴거>는
마치 ‘사랑’과 같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고 해요.
남자만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같이 못 삽니다.
둘이 서로 좋아하고 사랑해야 같이
삽니다. 삶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성령님, 성자와 구원자>가
아무리 사랑해 주며 구원해 주고
휴거시켜 준다 해도 <본인>이 원치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땅에서
육으로도, 천국에서 영으로도
같이 못 삽니다.
만일 아무리 <성삼위와 구원자>가
사랑해 주며 구원해 줘도 <본인>이
원치 않으면 결국 섭리사를 떠나
‘사망’으로 갑니다.
<구원과 휴거>는 같이 해야 이룹니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을 자>가
같이 해야 <구원과 휴거>를
이루어 같이 살게 됩니다.
<성삼위와 구원자 쪽>에서만 구원해
주거나 <구원받는 자 쪽>에서만
구원을 이루려 하면, 100% 완전하게
해도 <구원>이 안 되고 같이 못
삽니다.
<구원과 휴거>를
‘사랑’으로 보면 쉽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마음과 삶이 다르니 같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의 세계>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100% 사랑하는데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남자가 좋다고만 하면
그 여자와 같이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는
그렇게 못 하십니다. 왜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편>만 인생들을 구원하고
사랑해서는 같이 살지 못합니다.
<인간>도 구원받기 원하고,
성삼위를 사랑하며 구원받기 위해
행하고, 성삼위가 원하시는 선까지
행해야만 구원받고 휴거되어
지상에서 육으로도, 천국에서 영으로도
사랑하며 살게 됩니다.
<구원>도 <휴거>도 <사랑>도
한쪽 편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양쪽 편이 다 원하고
행해야 이루어집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지 않으니,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자께서 그 육과 함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구원하고
휴거시켜 그 영을 천국에 데려다
놨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자와 그 육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기뻐하고 사랑하며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2015_0830 주일(서로 사랑해야 휴거다 구원이다).hwp2
본인은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니,
휴거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 좋다고 해서
사랑할 수 없고 같이 살 수 없습니다.
구원과 휴거도 그러합니다.
<구원하는 쪽>이 좋아서 구원해 줘도
<구원받는 쪽>이 원하지 않으니
같이 못 삽니다.
<구원받을 자>도 ‘같이’ 구원받기
원하고, 구원받기 위해 행하고
좋아해야 구원받고 같이 살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이란, 본인이 원하고,
바라고, 사랑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고로 <성삼위와 구원자>도
인생들을 사랑하고 구원하며,
<구원받을 본인>도 구원받기 원하고,
성삼위와 주를 사랑하고, 구원받기
위해 행하는 것이 ‘구원과 사랑의
작동’입니다. 양쪽이 같이 사랑하며
행하는 것이 ‘같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인생들을
구원하고 휴거시켜 사랑하며 같이
살려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믿기를 원치 않고, 구원받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니 지구 세상 수십억
명이 하나님을 안 믿고 삽니다.
‘믿기 싫다’ 함은
‘구원받기 싫다’ 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자를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세상으로 가서
신앙이 파선되는 자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받고 같이 살다가도
‘구원의 생활’을 안 하니, 거기서
‘신앙의 삶, 구원의 삶’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매일
<구원의 삶>을 살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구원>은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도 하다가 안 하면, 그날부터
‘사랑의 삶’이 끊어집니다. 겨울철에
물을 뜨겁게 끓였어도 계속 끓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식어서 결국
‘찬물’이 됩니다.
<구원>도 <휴거>도 <사랑>도
계속해서 그 삶을 살지 않으면,
결국 식어서 찬물이 되듯 합니다.
<구원과 휴거>는 ‘사랑’과 같아서
한쪽에서만 한다고 이루어지지도 않고
지속되지 않습니다.
<마이너스극 한쪽>으로만은 전기의
불이 안 켜지고, 전기의 기능을 할 수
없고, <정자>만으로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구원과 휴거>도 그러합니다.
<하늘 편>과 <인생 개인 편>
양쪽에서 행하여 마치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이 만나서 불이 켜지듯,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생명을
잉태하듯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와 구원자가
책임을 다해 주어 구원해 주고
휴거시켜 줘도
<구원받고 휴거된 자>가
‘구원과 휴거의 삶’을 살지 않고,
‘사랑의 책임’을 안 하고 살면
어쩔 수 없이 <구원>도 <휴거>도
상실되어 그 영도 멸망으로 가고,
그 육도 사망의 삶을 살다가 끝납니다.
젊은 날 하나님이 원하실 때는 자기
뜻대로 살고, 때 지나고 늙어서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받아 주신다면,
받아 줬을 때부터 부끄러운 구원을
이루며 살게 됩니다.
한 남자가 있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등을 돌리면, 그때는 그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택하여 사랑하고
삽니다. 그러니 그 여자가 후에 다시
돌아온다 해도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겠지요?
하나님이 원하시고 주가 원할 때
따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자가 되어
이 같은 꼴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그 품으로 불러오시고
저마다 ‘자기 때’를 주십니다.
그런데 가치를 모르고,
불신하고, 따르지 않으면
- 어떤 자는 뿌리 뽑힌 나무같이
그때 바로 사망으로 가기도 하고,
- 어떤 자는 자기가 몸부림쳐서 다시
돌아와 남은 인생을 가지고 아쉽게
행하며 부끄러운 구원을 이루기도
합니다.
<사랑>도 <구원>도 <휴거>도
‘생활’입니다. ‘삶’입니다.
고로 사랑의 삶, 구원의 삶, 휴거의
삶을 살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마치
‘밥을 안 먹는 것, 숨을 안 쉬는 것’과
같아서 <잠자는 삶, 죽은 삶>이 되어
더 이상 ‘사랑과 구원과 휴거의
기능’을 못 하게 됩니다.
<하늘 편>이 구원해 주고,
사랑해 주고, 휴거시켜 줘도
<본인>이 그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도, 사랑도, 휴거도 ‘상실’합니다.
매일 행하며 그 삶을 사는 자만
구원도, 사랑도, 휴거도 ‘보장’입니다.
<나무뿌리>가 자체적으로 물과 퇴비를
빨아들이듯이, <본인>이
‘구원과 휴거와 사랑의 삶’을
살면서 날마다 행해야 됩니다.
<휴거된 영>이 천국에 가서도
매일 누워서 가만히 있다면, 그 영은
그런 삶을 살다가 결국 돌덩이같이
한 장소에 들러붙어 있는 영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육신>이
‘구원과 휴거와 사랑의 삶’을 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잠자는 신앙’이
되어 결국 구원도 휴거도 사랑도
상실하고 ‘세상 사랑’으로 빠져
섭리사를 나가게 됩니다.
인생 누구나 <육신>은 ‘하나’입니다.
그 육신을 가지고 ‘하나의 삶’을
선택하여 살게 됩니다. <세상의 삶>
아니면 <하늘에 속한 삶>,
둘 중의 하나입니다.
<육신>이 ‘세상에 속한 삶’을 살면서
<마음>만 ‘하늘에 속한 삶’을 산다면,
구원도 휴거도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의 마음 위로에서 끝나게 됩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 행하지 않고
생각만 하면, 생각에서 끝나고 맙니다.
건물을 짓기 전에 ‘설계’를 하지요?
<마음과 생각>은 ‘행하기 위한
설계도’입니다. 행해야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둘이 실제로
사랑을 행하지 않고 매일 쳐다만 보고
있다면, 결국은 돌덩이나 나무로
보이고 그렇게 대하게 될 것입니다.
2015_0830 주일(서로 사랑해야 휴거다 구원이다).hwp3
30년 전에 잡목과 잡초가
무성한 ‘두 지역’이 있었습니다.
30년 후에 다시 보니, 한 지역은
여전히 잡목과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다른 한 지역은 차로도 만들고 집도
지어서 천국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차이는 무엇일까요?
행하지 않은 것,
행한 것의 차이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육’이 ‘육적’으로만 살다가 때가 되면
‘영’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육’이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와 주를 모시고 사랑하며 그
뜻대로 살다가 ‘자기 영’을 변화시켜서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지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 휴거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몰라서 안 믿고,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자기 육의
행위대로 <그 영혼>이 ‘무(無)’가
됩니다.
<무(無)가 된 혼과 영>에게는
‘구원과 휴거’가 없고,
‘지옥·무저갱·음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최고의 공의로 정하신 바’입니다.
고집·교만·무지·자기 주관·자기
입지·육적인 생각으로 많은 자들이
<생명권>에서 살다가도 <흑암>으로
갑니다.
고집·교만·무지·자기 주관·자기
입지·육적인 생각으로 <구원의 가치>와
<휴거의 가치>를 모르니, 종일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삽니다.
고로 <구원과 휴거>를 상실하고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하루만 받아도
‘이 세상에서 살 때 평생 받은
고통’보다 더 큽니다.
<영>으로 받으니 ‘1초’만 고통을
받아도 ‘육으로 1년 동안 받는
고통’보다 고통이 더 큽니다.
<황금성 천국의 삶>은 하루만 누려도
‘이 세상에서 육신이 평생 누려도 못
누리는 삶’입니다. <영>은 하루만
활동해도 <육>보다 1조 배 더
활동합니다.
<영>은 빛보다 수백조 배 더 빠르게
천국을 다니면서 사니, <천국>에서
하루만 살아도 ‘육신이 평생 누리는
기쁨’보다 더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지 말라고
성자가 지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성자께 등을 돌리고,
세상 사랑을 향해 떠났습니다.
결국 <육신>이 ‘지옥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후회해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왜요?
스스로는 그 깊은 사망권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과
구원자가 준 기회를 경히 여김으로
인해 기회를 놓치고 그대로 끝났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니,
사울 대신 ‘다윗’을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왕비 ‘와스디’가 자기 뜻대로 행하니
와스디 대신 ‘에스더’를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먼저 부른 자>가 못 하고 하늘을
등지니, 하나님은 <다른 자>를 불러서
이미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전에 못 한 사람’을 다시 부를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이 다시 와도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 끝났습니다.
고로 <성삼위와 주 앞에서 등을
돌리고 간 자>는 육신도 영혼도
시간이 갈수록 지금 처해 살고 있는
곳에서 자꾸만 더 ‘고통 속’으로
가기만 할 뿐입니다.
<구원받은 가치, 휴거된 가치>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알고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휴거된 자로서
매일 성삼위와 주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며 ‘구원의 삶,
휴거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휴거되고도 <육>이 이성 타락을 하면,
<휴거된 영>은 슬피 울면서 천국
황금성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이는 마치 <마음과 생각>은 정말
싫은데, <육>은 이성 관계를 한
격입니다.
육이 살아 있는 한
‘육과 영은 한 존재, 한 운명’입니다.
<자기 육>이 이성 타락을 했으니,
<휴거된 영>이 책임을 지고
‘자기 육신’을 살리려고 천국
황금성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이로써 <휴거된 영의 자격>을
스스로 박탈한 것입니다.
휴거되고도 <육>이 최고 죄인
‘이성 죄, 사랑 죄’를 지으면,
<사랑>으로 휴거됐는데 <사랑>으로
죄를 지었으니 치명적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깨끗한 존재자’로서
‘깨끗한 대상’과 함께 사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꺼려하십니다. 또한
<창조의 법>이 있으니, 사랑이 깨지면
같이 못 삽니다. 또한 본이 안 되니,
천국의 만민들에게 이야기를 못
하십니다.
<왕비>가 타인과 이성 관계를 했다면,
온 백성들 앞에 본이 안 되기 때문에
왕은 ‘왕비의 자격’을 박탈시킵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왕비 와스디’는
이성의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말을 듣지 않고 왕에게 무렴을
주었습니다.
이에 왕은 왕비가 온 백성들 앞에
본이 안 되니, 자신과 온 백성들을
위해서 ‘왕비 자격’을 박탈시키고,
후에 ‘에스더’를 다시 왕비로
세웠습니다.
휴거되고도 ‘이성 타락’을 하면,
<영의 위치>가 바뀝니다.
<육신의 위치>도 바뀝니다.
이는 천륜의 법칙입니다.
삼위일체는 ‘깨끗한 신’이십니다.
고로 ‘깨끗한 자’를 쓰십니다.
하늘과 땅에 소개가 되어
늘 보이기 때문입니다.
<깨진 그릇>은
‘잔칫집’이나 ‘좋은 곳’에는 못
쓰지요? 땅도 하늘도 동일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깨끗한 자>는 ‘깨끗한 것’으로
대하고, <완전한 자>는 ‘완전한
것’으로 대하고, <더러운 자>는
‘썩는 것’으로 대합니다.
2015_0830 주일(서로 사랑해야 휴거다 구원이다).hwp4
영의 세계가 그렇게 돌아갑니다.
<육>이 생시에 ‘더러운 행위’를 하면
그날 밤 꿈에 <혼>도 ‘더러운 영계’에
다닙니다.
이와 같이 <육의 행위>대로
<영>이 다 받게 됩니다.
휴거됐다 하나,
‘본인의 조건’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성자와 구원자>가 사랑해서
휴거시켜 준 것입니다.
자기가 몸부림쳐 행하지 않고
휴거됐으니 휴거됐다는 실감도
안 나고, 휴거의 가치도 모르는
것입니다.
고로 ‘이성 타락’이 아니어도
자기가 매일 ‘휴거의 삶’을 살지
않으면 <휴거>를 서서히 상실하기도
합니다.
매일! ‘휴거의 삶’을 살면서 계속!
‘휴거의 차원’을 높이며 살아야
됩니다.
차원을 높이지 않는 현재 위치는
‘휴거의 최하로서 죽음을 피하는
정도’입니다. 매일 행하며 차원을
높여야 매일 얻고 매일 변화됩니다.
성자는 <휴거의 가치,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자기 맘대로 행하는 자들과
사탄의 꾐을 받고 행하는 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애타게 해서 휴거시켜 놨는데,
자기가 몸부림쳐 행하지 않으니
끝까지 가치를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자기 갈 길을 가는구나.
이제 그 운명이 ‘동’에서 ‘서’로
바뀌었고, ‘사랑하는 마음’도 ‘정’도
없어졌다.
회개하고 다시 행하여 구원받는 길
외에는 살 길이 없다. 더 늦으면,
스스로 돌아와야 하는데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다. 다시 돌아오더라도
‘이전 같은 사랑’은 안 해 준다.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네 생각과 다르다.” 하셨습니다.
<생명책>은 ‘천국’에도 있고
‘땅의 구원자’에게도 있습니다.
구원자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생명책>에 기록합니다.
고로 ‘의로운 행위’가 없으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육도 영도 끝납니다.
<천국의 생명책>에서 이름이
없어졌어도 <땅의 구원자가 가지고
있는 생명책>에 이름이 있으면,
‘육의 행실’로 인해 <천국의 생명책>에
다시 이름이 새겨집니다.
그러나 <땅의 생명책>에서 이름이
없어지면, <천국의 생명책>에 새겨진
이름도 사라져 무(無)로 끝납니다.
육신이 살아 있는 한, <육의 행위>대로
‘영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구원의 삶, 휴거의 삶>은
‘망상의 삶’도 아니고
‘관념의 삶’도 아닙니다.
행하지 않으면 10년, 50년 가도
안 됩니다. 하는 자만 이룹니다.
정녕코 <육의 행위>대로 <육>도
<영>도 생명권으로, 혹은
사망권으로 가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도, 성자도, 성령님도,
주도 ‘영’을 보고 결정합니다.
어느 날 선생이 어떤 사람의 영을
봤는데, 다시는 그 얼굴을 못 보게
기도했습니다. 여름철의 썩은 과일
같았고, 시체가 오래되어 부패된 것
같았습니다.
그 흉한 얼굴이 계속 생각나는데,
정말 끔찍했습니다. 자꾸 그 얼굴이
떠올라서 더 이상 안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육신>은 아무 이상이 없어 보여도
역시 <영>은 ‘육신’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영’을 보고 결정합니다.
<자기 혼>은 거의
‘자기 육신이 하는 행위’를 합니다.
고로 <자기 혼>을 매일 봐야 됩니다.
기도하면 보입니다. <자기 혼>을 못
보는 자는 ‘혼의 급’이 낮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여 <자기 혼>이 무엇을 하는지
보세요. <혼>은 꼭 ‘육신의 행실’을
반영하여 보입니다.
고로 <자기 혼의 상태>를 보고
온전하게 하기입니다. 얼마든지
하면 되는데 안 합니다.
<자기 혼>과도 <자기 휴거된 영>과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와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고,
<구원자>와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습니다.
하세요! 하는 자가 느끼고,
하는 자가 얻습니다.
힘들다고 안 하고 게을러서
안 하면 골짜기에 물이 마르듯
‘신앙’이 마르게 됩니다.
<은혜의 비>는
‘자기’가 오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삼위일체를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자기>가
‘은혜의 비’를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영이 천국에 갔어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그곳이 <천국>인지 <땅>인지
모릅니다.
<땅>에서 ‘육’도, <천국>에서
‘휴거된 영’도 ‘활동하기,
대화하기’입니다.
이 시대는 <신부 시대>라서 ‘교통’이
없으면 끝납니다. <교통>이 없으면
‘끊어졌다. 죽었다.’ 합니다.
<말씀>만 가지고는 못 삽니다.
‘서로 대화, 교통’입니다.
성삼위를 부르며 대화,
주를 부르며 대화,
자기 혼을 부르며 대화,
휴거된 자기 영을 부르며 대화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하며
활동하기입니다. (믿습니까?) <전환>
◎ 오늘은 어떻게 해야
<구원과 휴거>가 이루어지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하는 하늘 편>만 구원해 주기를
원하고 사랑해 준다고 해서 구원받고
휴거되어 같이 사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 자 본인>도 구원받고
휴거되기를 원하고, 성삼위와 주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행하고, 늘
기도하고 교통하면서 그와 같은 삶을
2015_0830 주일(서로 사랑해야 휴거다 구원이다).hwp5
살아야 구원받고 휴거되어
같이 살 수 있다.
<구원과 휴거>는 ‘사랑’과 같다.
서로 사랑해야 사랑이 이루어지듯,
서로 사랑하고 서로 원하고 행해야
구원도 휴거도 이루어진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 조금만 더 말씀하고 말씀 마칩니다.
지금부터 전하는 말씀은 한 단계 더
깊이 심정으로 말씀하니, 잘 듣기
바랍니다. 구원받고 휴거되기 원하여
하고자 하는 자는 성자와 구원자가
해 줘도 힘이 안 듭니다.
그런데 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성자와 구원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3~4배 더 해 줘도 안 됩니다.
성자와 구원자가 해 줘도 본인이
원하지 않고 하고자 하지 않으니,
아무리 해 줘도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고로 시간 뺏기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야 됩니다.
성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고 휴거되지
못하면 ‘큰 자’는 못 된다.
그저 ‘땅에 속한 보통 사람’이다.
<휴거된 자>는 ‘개발한 월명동 같은
자’요, <휴거되지 못한 자>는
‘개발하기 전 월명동 같은 자’다.
고로 휴거되면 귀히 쓰이고,
휴거되지 못하면 그대로 끝난다.
<구원자>나 ‘구원과 휴거의 목적’
때문에 모든 인생들을 그리 크게 보고
귀히 여기지, 실상 인생은 ‘구원과
휴거’ 빼면, 쳐다볼 시간이 없다.
<구원과 휴거>를 뺀다면, 지구 세상
73억 명 중에 속한 한 생명에
불과하다. 지구 세상 73억 명 중에서
구원받고 휴거되기를 원하는 자,
하나님을 찾고 주를 찾는 자들을
찾아야 된다.
‘아무리 해 줘도 되지 않는 자’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올바로
판단하여 새로운 자를 찾아라.
사울 대신 ‘다윗’을 준비하고,
와스디 대신 ‘에스더’를 준비했으니,
찾아서 세워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성자의 사랑을 배신하고
구원자를 등지고 떠난 자들도
그러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계속 ‘험한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붙잡아 줘도
더욱 강하게 뿌리치며 ‘그 길’로
갑니다. 고로 그들을 보고 아쉬워하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빨리
‘새로운 자들’을 찾아서 세워야
됩니다.
아무리 잡아 줘도 뿌리치며 자기 길로
가는 자 한 명을 붙잡는 힘으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새로운 자
수십 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길로 가는 자들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서, 새로운 자들을 찾아
구원하지 않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고, 어서 빨리
‘새로운 자들’을 찾아서 세워야
됩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두셨습니다.
성삼위의 사랑을 배신한 자,
구원자를 등진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이미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자기 길’로 갔습니다.
결국 <자기>가 ‘사망의 길’로 가기로
결정하고 간 것입니다.
성삼위와 구원자가 그렇게 해
줬는데도 끝까지 고집하며
‘자기 길’로 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구원자’를
보내지 않으십니다. 고로 <그 영>은
영원히 ‘가련한 영’이 되어서 삽니다.
처음에는 그동안 정성 들여 대했으니
안쓰럽지만 결국 본인이 원치 않아
뿌리치고 갔으니 ‘뇌’에서 지우고,
그 대신 ‘더 나은 자’를 세워서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니 더 이상
‘그 사람’은 생각이 안 납니다.
그 사람에게 쏟은 정성은
‘새롭게 세운 자’를 통해 열매를 맺고,
영광이 빛나게 합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해 줄까요?
한 사람이 <어떤 물건>을 사려고
그리도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파는 자가 끝까지 안
팔아서 못 샀습니다. 그 물건을 못 산
것을 생각하니 너무 미련이
남았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 물건보다 훨씬 좋은 새 물건’을
찾기로 했습니다. 찾다가 결국 ‘그
물건보다 훨씬 좋은 새 물건’을 사게
됐습니다!
<새 물건>을 찾고 나니,
그때 ‘먼저 사려던 물건’을 주인이
안 팔아서 안 산 것을 천만다행으로
알고 기뻐했습니다.
<먼저 사려던 물건>을 주인이 팔아서
샀다면, <그보다 훨씬 좋은 새 물건>을
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물건>을
안 팔아서 <더 좋은 이 물건>을 찾게
된 것입니다. 마치 ‘밭에 숨겨진
보화’를 찾듯,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을 사게 됐습니다.
<처음에 사려던 것>은 ‘2가지 형태’를
갖췄는데, <새로 찾은 것>은 ‘10가지
형태’를 갖췄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생도 그러합니다.
<사울>이 못 하니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고, <와스디>가 못 하니
하나님은 <에스더>를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사울>보다 100배나 더
잘했고, <에스더>는 <와스디>보다
1000배나 더 잘했습니다.
성자와 구원자가 그리도 생명을
챙기며 구원해 줬는데도
자기가 ‘구원의 삶, 휴거의 삶,
사랑의 삶’을 살지 않고,
하고자 하지 않고, 책임을 못 해
나갔으니 스스로 다시 찾아오든지
안 오든지 그냥 놔두고,
다른 사람을 찾아야 됩니다.
선생은 처음에 <섭리사 전체의
성전>과 <수련원으로 쓸 곳>을
그리도 찾아다녔습니다. 마땅한 곳을
찾으면 개발해서 쓰려고, 한국
여기저기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후에 <월명동>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곳’임을 알고
월명동을 자연성전으로 개발하고 나니,
만 배나 좋았습니다. 최근에
<전에 자연성전으로 개발하려 했던
곳>을 가 보니, 20년이 넘었는데도
개발이 안 되어 그때보다 더
2015_0830 주일(서로 사랑해야 휴거다 구원이다).hwp6
가시덤불과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자기 책임을 하지 못하여 섭리사를
등진 자들도 결국 가시덤불과 잡초가
무성한 곳처럼 그렇게 인생이
끝났습니다.
성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임시로 만든 길>을
<늘 사용하는 길>로 삼지 마라.
<순간 쓴 자>를 <하늘 궁궐의
기둥>으로 세우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 궁궐을 짓고 나서 쓰러진다.
너희는
‘순간 쓰이는 자’가 되지 말아라.
하나님이 ‘생활 속에서 수시로 쓰는
자’는 다르다. 생각·정신·행위의
모양이 다르다.
<사울>은 자세히 보면 미련하고,
교만하고, 거짓되고, 야비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른 자로서
지혜롭고, 담대하고, 오직 하나님
뜻대로 행했다.
너희는
‘사울 같은 자’냐.
‘다윗 같은 자’냐.
<다윗 같은 자>로 뽑아 왔으니,
스스로 구원받고 휴거되기를 바라고
원하며 매일 성삼위와 주와 교통하며
구원의 삶, 휴거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라.” 하셨습니다.
◎ 말씀 서서히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구 세상의 모든 자들이
구원받고 천국에 오기를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를 보내 주시어 가르쳐 주시고,
자기 양심으로도, 자기 스스로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때 믿고 따르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고,
그때 안 믿으면 구원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예정>을 못 이룹니다.
고로 하나님이 지구 세상 모든 자들을
향해 <구원과 휴거>를 ‘예정’하셨어도
결국을 보면 <본인>이 믿느냐,
안 믿느냐를 결정하여 수십억은
안 믿고 살고, 약 20억 명은
우상을 섬기고 삽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지구 세상 모든
자들이 구원받고 천국에 오기를
예정해 놓으셨어도 ‘천국에 오는 자’는
많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행위대로입니다. 세상에
<귀한 물건>도 많지 않고,
<귀한 사람>도 많지 않고,
<미인>도 많지 않고,
<성공한 사람>도 많지 않고,
<좋은 지역>도 많지 않습니다. 또한
<휴거된 자>도 많지 않고,
<구원받은 자>도 많지 않고,
<성삼위의 사랑의 대상체가 된 자>도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곧 지구 세상 모든 자들이 구원받는
것도 불가능하고, 지구 세상 모든
자들이 멸망받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구원>, 아니면 <멸망>
이 두 가지 길 중의 하나에서
존재합니다.
자기가 구원받고 휴거되기 원하고,
믿고, 그 삶을 살면서 행하면
<구원과 휴거의 길>로 가고,
자기가 구원과 휴거에 신경 쓰지 않고
안 믿고, 믿어도 그와 같은 삶을 살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사망과 멸망의 길>로 갑니다.
자기 행위대로입니다.
세상을 보면, ‘자기가 사는 세계’만
알고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고 휴거되어 사는 자들’만
<구원과 휴거의 세계>를 알고 누리며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육의 세상>만 알고,
<육적인 것>에 모든 것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 오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누가 ‘관리’해 준다고 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관리해 줘도
‘관리’만으로는 못 삽니다.
나무를 보세요.
<뿌리>는 누가 관리하여 물을
빨아들이게 할 수 없습니다.
<자체 뿌리의 작용>으로 물을
빨아들여야 삽니다.
그 터전 위에 ‘관리’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스스로 말씀을 듣고 흡수하고,
행하는 능력이 있어야 삽니다.
그 터전 위에 관리입니다.
아름다운 나무가 죽었다 합시다.
죽은 나무를 보고 아까워하면서
계속 놓고 보겠습니까? 빨리
돌아다니면서 ‘산 나무’를 찾아서
갖다 심어야 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큰 나무라도 <죽은 나무>라면,
<살아 있는 작은 나무>만도 못합니다.
아무리 멋있고 큰 호랑이라도
<죽은 호랑이>라면,
<살아 있는 새끼 호랑이>만도
못합니다.
<죽은 시체>는 갈수록 부패됩니다.
고로 빨리 땅에 묻어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유익입니다. <신앙이 죽어서
다시는 못 살아나는 자>도 그러합니다.
성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숨 쉬는 자는 아무리 기능을 못 해도
땅에 묻지 못하듯이, <신앙>도 기능은
못 하는데 숨은 쉬고 있으니,
‘사망’에 묻을 수 없어서 그동안
지켜봤다. 그러다가 ‘신앙의 숨’을
멈추니, ‘사망’에 장사 지내게 된
것이다.
<육>이 한 번 죽으면 못 살아나듯이,
<영>도 한 번 사망으로 끝나면
다시는 못 살아난다.
<영>이 죽지 않게 하여라.
<육>이 죽지 않게 하여라.
스스로 구원받고 휴거되기를 원해라.
그리고 스스로 말씀을 듣기를 원하여
듣고 행해라. 자체적으로 말씀을
흡수하고 행하는 능력을 가져라.
그리고 관리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산다.”
◎ 말씀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