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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2016.04.17 (일)

160417 주일말씀 최종완성본

선포일
2016.04.17 (일)
성경 본문
마태복음 22장 37

첨부 파일

<2016년 4월 17일 주일말씀> 성찬식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라 고생돼도 생명길로 가라 본 문 마태복음 22장 37절 (핵심만 봉독)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문서 말씀은 4월 17일 생방송 말씀 내용 중에서 추가되고 교정된 내용으로 ‘최종 완성본’입니다. ◎ 할렐루야! 오늘은 <2016년 성찬식 주일>입니다. ◎ 하나님의 마지막 성약 섭리역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휴거 역사>를 맞았고, 지금 <휴거의 문>이 열려서 계속 <휴거>는 진행 중입니다. 이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자만이 최고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갈 수 있는 이때입니다. ◎ 이 귀한 때에 때에 따라 오늘은 <이 시대 성찬식>을 맞게 됐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의 평강과 성령님의 뜨거운 감동 감화 역사하심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 몇 년 동안 전해 준 ‘성찬식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 성찬의 의미와 사연>에 대해 알고 <성찬 예식>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이 시대 성찬의 의미와 사연>을 알아야 <성찬식>을 제대로 준비하고 맞을 수 있습니다. ◎ 매년 성찬식마다 똑같은 말씀을 전해 줄 수 없으니, 각자 ‘지난 성찬식 말씀’을 듣고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성찬식을 맞았던 분들은 <이 시대 성찬의 의미와 사연>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성찬식 말씀을 다시 듣고 준비했을 것이고, 올해 수료한 분들은 <이 시대 성찬의 의미와 사연>을 알고 성찬식을 맞기 위해서 성찬식 말씀을 다시 듣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 오늘은 그 터전 위에 말씀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 성자 주가 이 시대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핵심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라. 고생돼도 생명길로 가라.’입니다. <말씀 시작>  인생 앞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외길 (한 길)’이 아닙니다. 항상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곧 <성공의 길>과 <실패의 길> ‘두 길’입니다.  어떤 사람은 인생은 ‘외길’이라서 <성공 길>, 아니면 <실패 길> 하나만을 간다고 말하는데 그런 ‘무조건적인 운명의 외길’은 없습니다.  만일 사람이 돌이나 나무 같은 존재라면, 상대의 의향에 따라서 ‘길이 결정’됩니다. 돌이나 나무를 보세요. 돌 자신, 나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다고 해서 그 길로 가는 것이 결정되지 않지요? 돌을 가져가는 사람, 나무를 캐 가는 사람에 의해 자기 길이 결정되니 돌과 나무의 길은 ‘외길’입니다.  그러나 <사람>은 돌도 나무도 아닙니다. 인생은 살아 있기에 자기가 하기에 따라서, 살기에 따라서 <어떤 길>로 가느냐가 ‘결정’됩니다. 고로 인생들에게는 ‘외길’이 아니라 항상 ‘두 길, 양단의 길’이 있습니다.  사람은 뇌로 생각하고 몸으로 행하며 자기 인생, 자기 운명, 자기 삶을 결정짓고 삽니다. 곧 <자기 행위>에 따라서 ‘길’이 결정됩니다. 자기가 제대로 생각하고 행하면 <성공의 길>로 가게 되고, 자기가 제대로 못 하면 <실패의 길>로 가게 됩니다.  인생이라면 누구에게든지 <실패 없는 성공의 외길>도 없으며, <성공 없는 실패의 외길>도 없습니다. <성공의 길>로 갈 수도 있으니 실패할까 봐 실망하기만 할 수도 없고, <실패의 길>로 갈 수도 있으니 성공한다 생각하고 마음 놓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 어느 때는 <성공 쪽>이 70%이고 <실패 쪽>이 30%라서 <성공 쪽>이 훨씬 더 유력하니 행하는 대로 성공하게 됩니다.  어느 때는 <성공 쪽>이 90%나 되고, <실패 쪽>이 10%밖에 안 돼서 쉽게 성공할 수 있기도 합니다.  그러나 어느 때는 <성공 쪽>이 10%이고, <실패 쪽>이 90%라서 실패할 확률이 더 높기도 합니다.  그러나 인생을 보세요. 대부분 <성공 쪽>은 10%이고, <실패 쪽>이 90%나 됩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된다면 성공률이 90% 이상이니, 누구나 성공하기 쉬울 것입니다.  또한 ‘자기가 기존에 했던 것’을 버리고 ‘새 길’로 가려니, <성공률>이 10% 정도밖에 안 됩니다.  누구든지 ‘자기가 살던 기존의 삶, 기존의 길’을 뿌리치고 <새 길>을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 휴거의 길, 생명의 길>로 가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기존의 삶, 기존의 생각,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주가 주는 ‘새로운 진리’를 가지고 그에 따른 ‘새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 기존의 삶’을 조건으로 내주는 것입니다. <기존성>을 버리지 못하면 <새 것, 새 길>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기존의 것>을 내줘야 그 조건으로 ‘새 길’을 얻게 됩니다.  그래서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 길>로 갈 때는 <성공할 확률>이 10%이고, <실패할 확률>이 90%나 됩니다. 반복하자면, 기존성을 버리고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기가 해 왔던 것을 버리고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 이때 <성공할 수 있는 운명적인 결정>은... 곧 -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잠을 자고 일어날 때도 정말 힘들지요? 왜 그럴까요? 잠을 자고 있었으니, ‘잠자고 있던 기존성 90%’가 자기 생각도 몸도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존의 잠>을 버리고 <새롭게 새벽 일찍 일어나는 길>은 성공 확률이 10% 정도로 매우 낮아집니다. <기존성>이 90%나 장악하고 있으니, <새 길로 갈 가능성> 10%를 가지고 도전해야 됩니다. 이때는 ‘보통’으로 하면, <기존성> 때문에 집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일어나고자 하면, 그때는 ‘가능성 10%’가 ‘기존성 90%’를 이기고 일어나게 됩니다.  어떤 일이든 그러합니다. <기존성>은 기존에 자기가 해 왔던 것이고, 기존에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니 90%나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택하여 성공하려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야 됩니다. 그러면 <기존성>을 이기고 ‘성공의 길’로 가게 됩니다.  그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을 보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라. 이것이 제1계명이다. - 한 것입니다.  자기 생각과 자기 삶을 장악하고 있는 <90%의 기존성>을 버리지 않고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지 않으면, 절대 <새 길>을 ‘성공의 길’로 만들 수 없습니다. 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믿으며 기존 신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성’ 때문에 <새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존성’ 때문에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기존성’ 때문에 <새 역사, 새 길>로 오지 못했습니다.  예수님 앞에도 ‘양단의 길’이 있었는데, 곧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영광의 주>, 아니면 <고난의 주>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영광의 길>로 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난의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이 ‘영광의 주’가 되는 것은 <성공 쪽> 10%, <실패 쪽> 90%였습니다. 왜요? 유대 종교인들이 믿고 따르던 <기존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신약의 새 말씀>을 가르쳐서 예수님 자신을 ‘메시아’로 믿게 해야 그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마음>만으로 구원이 결정된다면, 예수님이 다 하면 되니까 쉽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구원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믿고 따르고 행해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기존 율법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믿고 있던 자들>이 “내가 믿던 방식과는 다르다. 내가 들었던 말씀과 다르다. 내가 알던 것과 다르다.” 하며 기존성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불신하고 핍박하고 반대했습니다. 고로 예수님 앞에 <성공 쪽 영광의 길>의 가능성은 10~20%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실패 쪽 고난의 길>로 갈 확률이 80~90%나 됐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결국 그 희박한 10%의 가능성을 가지고 결국 해내고 말았습니다! 어떻게요? 그냥은 안 됩니다. 이미 구시대는 불신한 채 끝났고,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도 책임 분담을 못 해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음과 뜻과 목숨 다해 끝까지 행했고, 본인의 ‘몸’을 십자가에 내주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죗값을 치루셨습니다. 그 ‘희생과 사랑의 조건’으로 사망으로 기울어진 판국을 뒤집어 만민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고, <새 역사, 신약의 길>을 펼쳐 놓으셨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 이 시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성자’를 보내시고, 성자는 ‘이 시대 구원자의 육신’을 쓰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예수님을 믿던 자들’이 새 역사 새 말씀을 불신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기존성> 때문에 ‘역사의 성공 확률’은 10%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새 역사를 따르며 시대 주를 믿고 따른 자들’도 자기 삶의 기존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주를 완전히 믿고 행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망으로 판국’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대로 두면, 구원이고 뭐고 다 끝이었습니다.  고로 시대 구원자는 또 ‘시대 십자가’를 지고 희생함으로 모든 값을 치르고 ‘사망으로 기울어진 판국’을 뒤집어 <새 역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 구약에서 신약까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늘 좋게 예정했으나, <기존성을 가진 자들>이 자기가 살던 대로 사느라 하나님의 역사를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도, 사사들도, 중심인물들도, 메시아도 <그 시대에 해당되는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고 다시 ‘사망으로 기울어진 판국’을 뒤집어 그들을 살렸습니다. 결국 ‘보낸 자의 희생’으로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폈습니다.  고로 이 시대도 주가 ‘십자가의 길’을 갔다고 곡하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주가 ‘희생’하여 ‘사망으로 기울어진 판국’을 뒤집고 <새 역사 휴거의 길>을 열어 놨습니다. 이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제대로 해야 됩니다.  주가 십자가를 안 지게 하려면 첫째, 기존성에 있는 자들 – 기성이 받아들였어야 됩니다. 둘째, 이미 주를 알고 따른 자들이 목숨 걸고 했어야 됩니다.  이방인들은 ‘생땅’이라서 힘듭니다. <생땅>이라는 말은 ‘한 번도 손대지 않고, 갈지도 않고, 거름도 주지 않아서 굳어 있는 땅’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이 뭘 알겠습니까? 이미 기존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던 자들이 <새 역사>를 알고 따르며, 이방인들까지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패되고 패역한 세대>가 되어 더욱 힘들게 됐습니다.  섭리역사가 시작된 지 20년이 넘었을 때도 기성인들은 안 따랐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새 역사>를 안 받아들였습니다.  그리고 ‘주를 알고 따르는 우리’가 잘했어야 합니다. 선생이 중국에 있을 때, 그때라도 정말 잘했어야 합니다.  첫째, <이 시대 기성인들>이 ‘시대 주’를 받아들이고 둘째, <시대 주를 알고 따르는 자들>이 하나 되어 마음과 뜻과 목숨 다해서 해야 성공할 확률이 90%입니다. 그런데 <기성>도 못 했고, <시대 주를 알고 따르는 자들>도 마음과 뜻과 목숨 다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90%가 불리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웠습니다.  주가 십자가를 안 지려면, 수십만, 수백만이 따랐어야 합니다. <시대>가 따라 줘야 <주>가 십자가를 안 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기에 <주>가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 이로 인해 사탄에게 당하고, 사탄은 시대 주를 ‘십자가’로 몰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랑’이 근본이지요? 이에 따라 사탄은 ‘사랑’에 이유를 달고, ‘창조 목적에 관한 십자가’로 몰고 갔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 지금 하는 말씀을 잘 들어요. 이것을 꼭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꼭 알고 ‘시대 성찬식’을 맞고, 주와 같이 이것에 대한 원통함을 가지고 이제는 정말 잘해야 됩니다.  시대 십자가를 질 때 억울하고 원통했지만, 그 억울함과 원통함은 ‘10년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시대 주를 알고 따른 자>들이 제대로 못 한 것, <기성>이 육성으로 흘러 사망에 처한 것, 이것이 그리도 억울하고 원통했습니다.  그러나 <시대 주>는 자기 몸을 내 주어 ‘희생’하여 값을 지불하고 ‘시대의 생명들’을 사고 ‘구원과 휴거의 길’을 열어 놨습니다. 결국 ‘시대 십자가’를 져 주고, 구원역사 6000년 만에 <휴거>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이 시대가!! ‘하늘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에덴동산의 뜻’을 <개인>이 아닌 <시대>가!! 이루었습니다! 그로 인해 1000년 동안 성약역사의 후손들에게도 ‘영광의 길’이 열렸습니다! 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 시대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그 ‘희생의 조건’으로 1000년 동안 성약역사를 힘 있게 펼쳐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 주가 십자가는 졌지만, 이 시대는 ‘육신’이 살았습니다. <육신>이 살았으니 계속해서 ‘생명의 양식, 말씀’을 줄 수 있었고, 모두 회개시키고 부활시키고 휴거의 때를 알게 하고 준비시켜 휴거시켰습니다!  <육신>은 십자가를 짐으로 인해 ‘미약’하지만 <영>은 더 치솟아 더 ‘신령’하게 되었고, 오히려 십자가를 짐으로 인해 <주 앞의 두 증인>과 <섭리 전체>도 더 ‘신령’하게 됐습니다.  고생돼도 ‘생명길’로 갔으니,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 고생돼도 희생하면서 ‘생명길’로 갔으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 <역사의 과정>에는 ‘환난과 핍박’이 많았지만, <과정 중의 모든 수고>는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결국>에는 성공했으니, <과정 중에 고생한 모든 것>도 결국 ‘성공’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실패’했지만 <현실>에 ‘성공’했다면, <과거의 모든 실패와 고생>까지 ‘자랑’하게 되고, ‘성공하기 위해 그렇게 고생했구나.’ 합니다.  올해 성찬식부터는 달라야 됩니다. <주>를 머리로 두고 <자신>은 ‘몸’이 되어 완전히 ‘주의 정신, 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주가 무엇 때문에 그리도 원통하고 억울한지 깨닫고 그 심정을 완전히 받고 <시대 성찬식>을 해야 됩니다. <잠시 쉬었다가>  하늘은 - 고생돼도 <생명길>로 갑니다. 90%가 불리하여 고생되더라도 <생명길>로 갑니다. 항상 그렇게 역사를 펴 나갔습니다.  하나님의 역사는 모르는 자들을 믿게 하고 기존성에 있는 자들을 ‘새 길’로 이끌어 와야 하기에 <90% 불리한 여건>에서 역사를 펴 나갑니다. 결국 나머지 <10%의 성공할 확률, 10% 가능성> 곧 <십일조>를 가지고 영적 싸움을 하면서 역사를 폈습니다.  예수님도 율법주의자들 앞에 <성공할 확률 10%>를 가지고 도전했습니다. 섭리역사도 그러합니다. 기존 신앙 90%에 맞서, 나머지 10%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 구시대인들은 ‘새 역사, 새 길’에 대해 캄캄하니까, 구시대는 <새 시대, 새 역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공할 확률도 낮고,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기존성> 때문에 불리한 조건으로 ‘새 길’로 가는 것입니다.  고로 <주>는 ‘희생’으로 값을 지불했습니다. 고생돼도 생명길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 첫 번째에는 잘 안 됐습니까? 그러면 두 번째에는 잠을 안 자고 하면 됩니다. 이것이 ‘희생’입니다. 목적지에 가려고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 합시다. 그러니 ‘성공률 10%, 실패율 90%’입니다. 이때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잠 안 자고 먹을 것 안 먹고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는 섭리역사를 펴 오면서 ‘이런 길’을 갔습니다.  야심작도 계속 쌓았지만 무너졌지요? 고생돼도 마음과 뜻과 목숨 다해 기어코 다시 쌓았습니다. 주는 ‘이런 길’을 갔습니다.  주가 이렇게 살아왔기에 <낮은 성공 확률>을 가지고서도 <이 시대 구원과 휴거의 길>을 열어 놓고, <휴거>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고 만 것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미 <구시대>는 ‘부정부패’로 죽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못 풀어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구시대>는 끝나서 더 이상 길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제자들>도 책임 분담을 못 했습니다. 그들이 책임 분담을 했으면 가능했습니다.  <구시대>도 끝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책임을 못 해서 끝났는데, ‘메시아 예수님의 희생’으로 다시 살려 줬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육신>은 ‘삶의 부활’을 이루었고, <영>은 ‘영의 부활’을 이루었습니다!  이 시대도 그러합니다! 이미 <기성>은 따르지 않고 불신했고, <시대 주를 알고 따르는 자들>도 제대로 책임을 못 했습니다. 그대로 두면 판국이 기울어 끝나 버립니다. 이때 <주>가 ‘희생’하여 다시 살린 것입니다. <주>가 ‘희생’으로 값을 지불하여 시대 생명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모두 ‘신부로 부활’되었고 ‘휴거’되었습니다.  그냥 살아나고, 그냥 부활되고, 그냥 죄가 청산되고, 그냥 구원받고 그냥 휴거된 것이 아닙니다. <주의 희생>으로 된 것입니다. 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절대 ‘그’를 믿어야 됩니다. <주>가 희생함으로 값을 지불하여 샀으니, 이제 ‘자신들의 몸’이 아니라 ‘주의 몸’이 된 것입니다. 고로 100% <주>를 믿고 시인하며, <주>와 생각 일체, 행동 일체, 사랑 일체 되어 <주의 몸>이 되어 살아야 됩니다.  이것을 잊지 말고,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됩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란, ‘의지’를 말합니다. <의지>는 ‘절대 필요성’을 가질 때, 생기게 됩니다. 누가 값을 지불하여 사망에 속한 자기를 샀는지 깨닫고, 누구로 인해 자기가 구원받고 휴거를 이루게 됐는지 깨닫고, <시대 주의 가치>와 <새 역사의 가치>를 깨닫고, 절대 ‘주의 필요성, 휴거의 필요성’을 깨달아야 됩니다.  절대 <하고자 하는 마음>, 곧 ‘의지’를 가지고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주와 같이 행해야 됩니다. 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냐고요? <기존성을 버리고 도전하는 것>이니, 성공 쪽 확률은 10% 정도입니다. 고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야 성공합니다.  <신앙>뿐 아니라 <인생>도 ‘불리한 것’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고로 섣불리 하면 안 됩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만 해도 ‘불리한 상태’에서 ‘새 길’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왜요? 몸도 생각도 ‘잠자는 쪽’으로 장악되어 있는데, <잠자는 기존성>을 버리고 일어나려니 불리하고 힘듭니다. 고생돼도 생명길로 가겠다는 정신을 가지고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면, <성공률 10%>를 가지고 <기존성 90%>를 물리치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 신앙의 길, 인생의 길도 그러합니다. <기존성> 때문에 불리하고 힘드니, 섣불리 하면 안 됩니다. 고생돼도 생명길로 가겠다 결심하고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해야 기존성을 뿌리치고 불리한 조건을 이기고 성공합니다.  언제 해야 되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 해야 됩니다. 인생 성공, 신앙 성공은 살아 있을 때 쇼부를 봐야 됩니다. 잠잘 때는 먹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합니다. 잠에서 깼을 때 먹고 행하며 쇼부를 봐야 됩니다. 이와 같이 정신이 살아 있고, 육이 살아 있을 때 쇼부를 봐야 됩니다. 육신이 살아 있을 때 딱 잡고 뒤집고, 또 딱 잡고 뒤집어야 됩니다! <말씀 마무리> ◎ 말씀 마무리하겠습니다.  자기 인생, - 누가 결정합니까? 하나님은 ‘좋게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좋게 예정해 놓으셨어도 결국은 ‘자기 행위’로 <성공 길>, 혹은 <실패 길>이 결정됩니다.  <너의 행위>로 ‘실패의 길’로 가고 있느냐? <너의 죄>로 ‘실패의 길’로 가고 있느냐? 이제 소용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결정한 채 생각하고 행해 버리면, 주가 희생하고 용서하여 준 ‘구원과 휴거’가 다 깨져 버린다. 결국 ‘자기’가 깨뜨리는 것이다. 다시 방향을 돌려 ‘주의 뜻’대로 행해라. 그리하여 ‘너의 옳은 행위’로 다시 <성공의 길>로 가자. 그러나 성공할 확률은 10%다. 왜? 네가 기존에 생각하던 것, 살아 왔던 ‘기존성’이 있으니 그러하다. 그 ‘기존성’이 90% 너의 삶을 장악하고 있으니 힘들다. 고생돼도 생명길로 가자! 주가 희생하여 너를 살렸으니, 이제 주를 절대 믿고 마음과 뜻과 목숨 다해 주 뜻대로 하자. 그리고 주의 몸이 되어 살자! 그를 머리로 하여 주의 몸이 되어 행하자!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라! 이 말이 ‘운명의 단어’다. ◎ 말씀 마쳤습니다. 이제 <성찬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