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2016.07.06 (수)
160706 수요말씀(기도는 입력이다 외 두 가지 말씀)
- 선포일
- 2016.07.06 (수)
- 성경 본문
- 마태복음 13장 13
첨부 파일
- PDF
160706-수요말씀(기도는_입력이다_외_두_가지_말씀).pdf
174.1 KB
<2016년 7월 6일 수요말씀>
기도는 입력이다
삼위일체는 ‘비유의 거울’을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때마다 전환하고 차원 높여 새롭게 해라
다양하게 해라
본 문 마태복음 13장 13절, 34-35절
할렐루야!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의 평강과
성령님의 뜨거운 감동 감화 역사하심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 이번 주 주일에는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첫째, 기도는 ‘입력’이다.
둘째, 삼위일체는 ‘사람이 쓰는 말’과
‘사람이 쓰는 존재물’로 말씀하고 보여 주신다.
셋째, 삼위일체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 오늘은 주일말씀의 핵심을 말씀해 주면서,
주일에 못다 한 말씀을 <잠언>으로 더 해 주겠습니다.
◎ 오늘 말씀의 주제는
첫째, 기도는 입력이다.
둘째, 삼위일체는 ‘비유의 거울’을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셋째, 때마다 전환하고 차원 높여 새롭게 해라.
다양하게 해라. -입니다.
* 설교자 참고
<잠언>으로는 ‘~다. ~해라.’로 끝나지만,
<설교>로 할 때는 ‘~입니다. ~하기 바랍니다.’ 등으로 바꿔서
설교식으로 말씀해도 된다.
<말씀 시작>
자기 전에 꼭 ‘새벽 제시간’에 깨워 달라고 기도하면서
꿈에 또렷하게 보여 달라고 했다.
꿈에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선생은 자고 있었다.
누가 순간 나를 스치기에 일어나 보니,
여자 대통령이 내 옆에 있다가
어느새 시간이 되어 내린다고 하며 가방을 끌고 나가고 있었다.
깨 보니 새벽 1시였다.
성령님이 꿈을 또렷하게 보여 주며 깨워 주신 것이다.
<여자 대통령>은 ‘성령님’을 비유로 보여 주신 것이다.
제시간에 일어나서 기도하니,
몸도 마음도 상황도 ‘성령님’과 함께할 수 있었다.
하나님, 성령님 말씀 - <기도>는 ‘입력’이다.
기도하는 대로 뇌에 입력되어,
때가 되면 그대로 행하여 이루어진다.
새벽에 일어나기 전에 꿈꾼 것이
확실히 기억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먼저 ‘자기 뇌와 생각’에 그 말이 입력되고,
‘자기 뇌의 그릇’도 준비가 되어 기억난다.
그리고 ‘하나님과 성령님의 마음과 생각’에도
기도한 것이 입력된다.
고로 그 기도대로 행하시어 꿈꾼 것이 생각나게 해 주신다.
<기도>는
‘자기 뇌와 마음과 생각’에 입력하는 것이며,
‘삼위의 마음과 생각’에 입력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뇌와 생각에 입력되어 있는 것’을 행하는데,
‘입력된 것 중에서 원하는 것’을 행한다.
하나님도 성령님도 성자도 ‘생각에 있는 것’을 행하신다.
그러니 꼭 <자기 생각>에도, <삼위의 마음과 생각>에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입력’해 놔야 된다.
<기도와 대화>로 강하게 ‘입력’해 놓아라!
그래야 <자기>도 행하고, <삼위일체>도 합당하면 해 주신다.
<잠시 쉬었다가>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는
사람들이 ‘삼위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사람들이 쓰는 단어와 말>을 사용하고,
<사람들이 쓰는 존재물>을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가 잘 쓰는 말, 상대가 잘 이해하는 말>을 사용하고,
<상대가 잘 쓰는 존재물>을 사용하여 말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매일 사용하며 산다.
고로 ‘만물’을 사용하여 말하면 잘 이해한다.
고로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는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비유’로 보여 주며 말씀하신다.
<비유>를 왜 쓰는지, 확실히 깨달아라.
직접 말하면, 잘 모른다.
<비유>를 써야 각종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여,
깨닫는 자가 각종으로 다양하게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성령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자기 주관>으로 행하는 것을 두고 깨우쳐 준다 하자.
본인에게 “너는 네 생각대로 행한다.
성령의 생각대로 하지 않는다.” 하고 직접 말하면,
“나는 성령님 부르면서 열심히 했는데...” 하며
잘 인정하지 않고 이해도 못 한다. 감정도 상한다.
그러나 ‘비유’를 들어
<성령을 대신한 자>를 보여 주고
<본인을 대신한 자>를 보여 주며,
그 사람이 성령이 대신한 자가 말해도 안 듣는 것을 보여 주면,
자신이 스스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깨닫는다.
그러면 확실하게 알고, 스스로 시인한다.
<비유>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고로 ‘스스로 못 보는 것, 안 보이는 것’을 보게 한다.
“너 얼굴이 많이 그을렸다.” 하고 직접 말해도
자기 얼굴은 ‘거울’이 없이는 못 보니
이해를 못 하고, 실감을 못 하고, 가슴 뜨끔하게 알지 못한다.
이때 ‘거울’로 보여 주면서 “너 얼굴 많이 그을렸다.” 하면,
“맞네! 아예 검게 타 버렸네!” 하고 인정한다.
이와 같이 <비유>는 ‘거울’이 되어
못 보고 안 보이던 것을 보게 하고, 모르던 것을 느끼고 알게 한다.
고로 기도하여 - 자신이 못 보고 모르는 것을
꿈에나 생시에나 <비유의 거울>로 보여 달라고 간구해라.
<비유의 거울>로 교훈과 책망과 교육과 가르침을 달라고 간구해라.
<적절한 최고의 비유>는
- ‘앞, 뒤, 속까지 비추는 거울’과 같고,
- ‘속까지 보는 X-ray’와 같고,
- ‘신혼골수를 투시하는 투시경’과 같다.
<비유>는 속까지 투시하며
오묘하고 날카롭고 예리하고 신비하게 감동을 주며 깨닫게 한다.
얼굴 단장, 옷단장은 ‘거울’을 보고 하듯,
매일 기도할 때나, 꿈에나, 생시에나
삼위는 <비유의 말씀>을 들어 가르치고 계시하며 깨닫게 하신다.
잠언도, 설교 말씀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고로 깊이 투시하여 각종으로 다양하게 깨닫게 하고,
스스로 인정하고 시인하게 한다.
하나님은 옛적부터 ‘비유의 하나님’이시다.
구약 때부터 신약을 거쳐, 이 시대까지 ‘비유’로 말씀하시며,
다양하게 보여 주며 스스로 인정하고 깨닫게 하신다.
이 시대 ‘휴거 비유’에 대해서도 밝히 밝혀 주며
그 의미도 말씀해 주셨다.
신약시대 메시아 예수님도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다.
이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비유>를 ‘거울’같이 사용하시며,
‘그 시대 사명자’들을 통해 시대 역사를 밝히 펴 나가신다.
삼위일체는 <만물>을 ‘글’로 삼고 ‘거울’로 삼고,
인간들에게 매일 <만물>을 보여 주며
<삼위일체>를 깨우쳐 주고
<삼위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우쳐 주신다.
삼위일체는 <비유>를 통해 보고 듣게 하신다.
그러다 ‘실제로 뜻이 이루어지는 때’가 오면, <실체>를 보이신다.
그 <실체>를 보고 깨닫게 하신다.
<선악과>도 ‘과일’을 비유로 들어 말씀했다.
그러다 ‘비유의 시대’가 가면, <실체>를 말해 주며 알게 한다.
<잠시 쉬었다가>
꿈에 - ‘주의 영이나 혼’이 다니면서 보면
- 주께 인사 정도 하는 자들이 있고,
- 이야기해야 알고, 안 따르고 그 자리에서 머무는 자들도 많다.
생시에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네끼리만 친하게 지내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따르다가 자기 하던 일을 중심하여 그 일을 하러 간다.
어떤 자는 멀리서도 알아보고 따라다닌다.
모두 ‘평소 생시에 자기 생각과 행위’대로
‘혼계와 영계’에서도 행한다.
“너는 주를 멀리한다.” 하고 직접 말로 하면, 잘 못 깨닫는다.
이렇게 <꿈에 비유로 본 것>을 말해 주면,
각자 자기 차원대로 깨닫고 인정하고 시인한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물었다.
“섭리인들이 ‘주여, 주여!’ 하면서도
꿈에서는 왜 주를 못 알아보고,
기뻐하지 않고, 안 따르는 것입니까?” 했다.
대답하시기를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이라 그러하다.
<육>과 가까우면 ‘육’과 잘 통하고,
<혼과 영>과 교통하면서 친하고 가까우면
혼계에서 ‘혼’을 봐도 친하게 대하고 가까이 대하며 통한다.
꿈에서, 혼계에서 본 대로
생시에서도 <육>이 자기중심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혼>도 <영>도 차원이 높아지지 않는다.” 하셨다.
꿈에 - 사람들이 다니는 길옆에
사자 한 마리가 우리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그 우리에는 사람이 들어가는 문도 있었다.
사자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관리를 못 하여,
사람들이 거기 들어가서 매일 한 명씩 죽어 나갔다.
이는 생명 관리를 잘 못 해서 매일 생명들이 죽어 간다는 계시다.
<비유>로 보여 주어 ‘이와 같이 이러하다.’ 함을 깨닫게 하신다.
꿈에 - 사람들이 좁은 마당만 한 공터에서
야구팀을 만들어서 야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편하지 않은 땅을 뛰면서 야구를 했고,
공을 치면 공들이 밭과 풀숲으로 날아갔다.
참 힘들게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선생은 성령께 묻기를
“넓은 월명동 운동장도 있는데
왜 산 넘어 공터에서 저럽니까?” 하니,
“차원이 낮으면, 옆에 큰 운동장이 있어도 못 보고 못 쓴다.
차원이 낮으니, 다른 곳을 못 보고 자기들이 처한 곳만 본다.
그곳에는 넓은 장소가 없으니까 저기서 저런다.” 하셨다.
자기 생각과 행위의 차원대로 ‘거기’에 처해 살고, 받고, 누린다.
혼계에 가서 보니 ‘섭리인들의 옷’이 다양했다.
<보통 옷>을 입는 자들도 있었고,
<조금 환한 옷>을 입는 자들도 있었고,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먼저 선생을 알아보고 따랐다.
교역자든지, 지도자든지, 어느 누구든지
<자기 주관대로 하는 자들>은 ‘최하 단계’에 있었다.
최하 단계에서는 “나 선생이다!” 하고 말해도
“예.” 하고 인사나 하고 그냥 제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도 있었고,
옆의 사람들과 종알대며 이야기하는 자들도 있었고,
기도한다며 쭈그리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휴거의 영’이 참으로 걱정됐다.
자유의지대로 그냥 놔두고 다른 곳으로 깊이 들어갔다.
차원 높이 들어갈수록
그곳에 있는 자들은 선생을 바로 알아보고 쫓아오기도 했다.
그들이 입은 옷을 보니 깨끗했고, 단장한 모습이었다.
<육의 의의 행실>로 인해 ‘혼’도 단장한 것이었다.
쭉 나오다가 보니 ‘밭’이 보였는데
<메마른 밭의 곡식들>이 있었고, <좋은 밭의 곡식들>이 있었다.
둘은 판이하게 차이가 났다.
더 나오다가 보니 ‘돌들’이 보였는데,
<막돌>이 있었고 <형상이 있는 좋은 돌>이 있었다.
<막돌>은 그 자리에 놓고 보는 배경 돌이었고,
<형상이 있는 좋은 돌>은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게 해 놨다.
각각 ‘자기 존재 행위’대로 형성되어,
주인이 마음에 들면 ‘더 좋은 환경’에 갖다 놓기도 했다.
선생은 <좋은 돌 중의 몇 개>를 골라서 가져왔다.
섭리사 현실도 이와 같이 이러하다.
아무리 봐도 눈만 피로하고
아무리 들어도 귀만 닳고,
아무리 말해도 입만 아프다.
아무리 용서하고 사랑해도 지치기만 한다.
고로 가르치고 키워서
본인이 알고 마음과 뜻과 목숨 다해 극을 향해 행하면서
자기가 깨달은 대로 목적을 위해 살게 해야 된다.
그래야 ‘각종 목적한 것들’로 불이 붙고,
하늘을 향한 사랑도 극으로 불타 행하고,
목적을 이루며 기뻐하고 흥분하며 살게 된다.
<전환> 중요 부분
◎ 이제 앞의 말씀과 연결시키면서, 다음 말씀을 전해 주겠습니다.
<눈으로 볼 때>만 느끼고,
<귀로 들을 때>만 느끼고,
<몸에 닿을 때>만 느끼고,
<먹을 때>만 느끼고,
<말할 때>만 느낀다.
<육>은 이와 같이 ‘한계’를 놓고 창조되었다.
고로 <영에 속한 생각의 뇌>로 느끼고 행해라.
<뇌>는 생각하는 대로 느낀다.
영체와 혼체도 ‘영’에 속해 있기에
뇌에서 ‘생각’만 해도 느낀다.
영적인 자, 정신적인 자는
눈으로 안 보고, 귀로 안 듣고, 몸으로 안 닿고, 말을 안 해도
<생각>으로 느끼니 - 극적으로 많이 느끼고 산다.
<육신>은 오래 느끼려고
계속 보고, 계속 듣고, 계속 먹고, 계속 말하고, 계속 사랑해도
<육>으로 느낌이 와서 한계가 있기에
금세 감각이 둔해져서 계속 느끼지 못한다.
가령 <살>이 닿아야 느끼는데, 계속 살을 대고 있어 보아라.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느냐.
감각이 둔해져서
<살>이 닿는지, <쇠>가 닿는지, <흙>이 닿는지 못 느끼고,
아무것도 안 닿은 것처럼 느껴진다.
<육>은 ‘한계’가 있다.
<예리한 신경>도 ‘한계’가 있다.
가령 겨울에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따뜻한 느낌’이 강렬하게 온다.
그런데 오랫동안 느끼려고 계속 있으면,
신경이 둔해져서 <물속>에 있는지 <물 밖>에 있는지 못 느낀다.
<육의 몸>도, <살>도, <신경>도
뜨거운 물속에 계속 있으면, 감각을 잃는다.
고로 처음같이 뜨겁지 않다.
<몸>과 <살>과 <신경>은 이러하다.
그 위 단계인 <정신과 생각 단계>로 계속 접해도
시간이 지나면 처음같이 짜릿하지 않고 강렬하지 않다.
고로 <몸>도, <신경>도, <마음>도
때에 따라 ‘전환’시키며 대해야 된다.
신앙생활, 섭리의 삶, 휴거의 삶도 동일하다.
계속하다 보면 처음같이 감동도, 느낌도, 기쁨도 강렬함이 없다.
고로 때에 따라 ‘전환’하여 새롭게 지혜롭게 해야 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도
때에 따라 <구약 - 신약 - 성약>으로 ‘전환’하여
새롭게 펴 나갔다.
고로 역사를 강렬하게 느끼고,
흥분하고 기뻐하고 행하며 누리도록 했다.
<생명의 말씀>도 ‘극’으로 계속 들으면,
그 말씀이 그 말씀같이 들린다.
그만큼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해졌기 때문이다.
<차원>이 높아지지 않고 그 자리, 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차원>을 높여 ‘다음 위치, 다음 단계’로 가야
<말씀>도 ‘다음 단계의 극’으로 들리고 깨닫게 된다.
<사람의 생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변화’를 주어 행하면서
계절처럼 ‘차원’을 높이고 ‘방향’을 돌려서 해야
계속 더 느끼고, 흥분되고, 희망찬 것이다.
늘 먹던 음식인데 ‘요리법’을 바꾸지 않고
계속 같은 방법으로 요리해서 먹으면
지겹고, 권태가 오고, 입맛을 잃게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하면 설렌다. 흥분된다. 맛있다.
<말씀>도 그러하다.
아무리 ‘위대한 시대 말씀’이라도
늘 똑같은 방법으로 가르치면 권태가 온다.
<말씀>을 다양하게 가르쳐라.
<찬양과 예술>로 말씀을 나타내고,
<성령집회>로 말씀을 강렬하게 나타내고,
<각종 방법>으로 말씀을 다양하게 가르치며
생명들을 다양하게 인도해 주어라.
음식을 다양하게 만들어 주듯 해야 된다.
<먹는 자리>만 바뀌어도 ‘음식 맛’이 다르다.
<말씀>도 이와 같이 가르쳐야 된다.
말씀만 듣고 ‘아멘’ 하고 끝내지 말고,
교역자들은 연구하고 의논하여 ‘새 방법들’을 실행해라.
<예술>도 다양하게 나타내라.
<예배 분위기>도 다양하게 해 보아라.
<교육>도 다양하게, <강의>도 다양하게 해라.
그러면 ‘생명 손실’이 없어진다.
<차원>이 낮고 <기술>이 없으면, 생명들을 놓친다.
꼭 행해라. 행해야 역사가 일어난다!
<말씀과 성령>으로
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이벤트를 해 주며
생명들을 이끌어야 된다.
이렇게 하는 교회는 ‘부흥’된다!
방 안에서 가르치다가,
밖에 나가서 그늘 밑에서 가르치고,
더우면 물에 들어가서 가르쳐라.
<자기 삶>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여 ‘주와 일체’ 되어 다양하게 행해라.
그래야 권태가 없고, 기쁨과 흥분과 희망이다.
<좋은 음식>도 계속 먹으면, 일주일만 가도 질린다.
고로 그보다 못한 음식이라도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그때는 <다른 음식>을 먹어야 입맛이 당겨서 먹게 된다.
때마다 ‘전환’하며 새롭게 하고 다양하게 해라.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그러하고,
<생명을 인도하는 것>도 그러하고,
<신앙생활>도 그러하고,
<휴거의 삶, 섭리의 삶>도 그러하고,
<각종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따르는 자들은 다양하여 특기자, 재능자들이 모여드는데
지도자가 ‘다양성’이 없고
속 터지고 답답하게 ‘자기중심’으로만 행하니
바로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따르는 자들이 답답하다 소리치고,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거나 세상으로 간다.
세상은 다양하다.
세상으로 눈을 돌리지 않게 하려면,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생명들을 다양하게 잘 이끌어야 된다.
연구해라! 때마다 전환하면서 새롭게 해라. 차원을 높여라!
목회자나 지도자가 때마다 전환하며 새롭게 하지 못하면,
아예 <방법>을 달리하고 새롭게 하여
‘다른 목회자나 지도자’로 교체하여 하게 한다.
운전할 줄 알아도 사고를 내면, 운전을 안 맡긴다.
안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은 특히!
<하나님의 뜻>을 두고 ‘주와 일체’ 되어
주가 말한 대로 마음과 뜻과 목숨 다해 해라.
자기 식으로 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6000년 동안 역사를 이끌어 오셨겠느냐.
지도자가 ‘삼위와 주와 일체’ 되지 않으면
‘자기중심, 자기 식’으로 가게 되고,
‘청중 심리’로 가게 된다. - 고로 큰일 난다.
<뇌>에 ‘자기 사고’가 입력된 채로 행하면, 사고 난다.
<뇌>에 ‘하나님의 사고와 생각’이 입력되어 행해야 된다.
<자기 행위>가 결국 ‘자기에게 한계’를 맞게 한다.
연구해라! 때마다 전환하면서 새롭게 해라. 차원을 높여라!
<말씀 마무리>
◎ 말씀 서서히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땅에서 진행된 구원역사가 6000년이나 지났다.
땅의 사람들에게 참으로 길고도 긴 역사였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이 기간이 짧겠느냐.
하나님도 같이 ‘긴 역사’를 보내셨다.
인간과 같이 행하며 맞춰 오셨기 때문이다.
<구원역사>는 ‘하나님 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삼위가 ‘인간과 함께’ 이루는 역사다.
고로 삼위도 인간과 같이 맞추면서 ‘길고 긴 역사’를 보내셨다.
◎ 이 말씀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줄게요.
가령 어른이 어린아이와 같이 4만 미터를 걸었다 하자.
어린아이에게만 ‘긴 거리’가 아니다.
어른에게도 ‘긴 거리’다.
어른도 ‘어린아이와 같이’ 발맞춰 걸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빨리 못 가니,
어른은 어린아이의 속도에 맞춰서 걸어야 한다.
고로 어른이 오히려 더 답답하고 더 길게 느낀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도
인간들을 데리고 이 땅에 ‘구원역사’를 펴 오시면서 그러하셨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만큼만 인생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
어른과 같이 살아도, 어른이 사랑해 줘도
<어린아이>만큼만 사랑을 느끼고 받는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인간’만큼만 인생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
하나님이 인간을 아무리 사랑해 줘도
인간이 성장한 만큼만 느끼고, 성장한 만큼만 사랑을 받고 누린다.
인생도, 사랑도 느낌을 많이 받고 누리려면,
차원 높여 성장하여 신이 되기까지 만들어라.
음식이 <위>에 들어갔으면 <장>에도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이 <뇌>에 들어갔으면 <온몸>에도 들어간 것이다.
<생각>이 ‘뇌’다.
고로 생각하면 <뇌>에 들어간 것이고,
<몸>에도 들어가 행하게 한다.
<위쪽>이 들어갔으면 <아래쪽>도 들어간 것이다.
<머리>가 들어갔으면 <발>도 들어간 것이다.
<한 몸 일체>다.
<생각>이 가면 <몸>도 가고, <몸>이 가면 <생각>도 간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 주를 <생각>으로 극으로 사랑한 자는
<몸>으로도 극으로 사랑한 자다.
<마음과 생각>으로 진정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 주를 사랑했으면,
<뇌>도 <신경>도 <몸>도 사랑한 것이다.
생각 따로, 몸 따로가 아니다. 연결된 것은 하나다.
삼위와 주께 사랑받고, 삼위와 주를 사랑했어도 - 모른다.
이는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과’를 주며 같이 먹자고 하여 모두 먹었다.
하나님이 같이 먹었어도 모른다.
왜? ‘주스’로 만들어 <신의 방법>대로 잡수셨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했다.
<사랑>도 이렇게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도 모른다.
<신의 사랑의 방법을 아는 자>가 알고,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전한다.
먹어도 모르고, 취해도 모르고, 같이 살아도 모른다.
방법을 달리하면서 행할 것을 다 행하고 지나가도 모른다.
지금 이 시대가 그러하다.
하나님은 ‘재림’처럼,‘휴거’처럼
<방법>을 달리하여 ‘보낸 자’를 통해 행하신다.
그러나 봐도 모른다. 행해도 모른다.
이 시대 사람들은 봐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고, 행해도 모른다.
이 시대 신부들 역시
보기는 하는데 모르고, 듣기는 하는데 모르고,
행하기는 하는데 깨닫지를 못한다.
<아는 자>가 ‘신’이 되어
‘전능하신 신의 깊은 말씀’을 이해하고 행하고 전해 준다.
◎ 말씀 마쳤습니다.